토지정의

토지 정의 관점에서 읽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

강산21 2006. 7. 26. 12:43

토지 정의 관점에서 읽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



박창수


영성 신학은 기독교적 삶


『현실, 하나님의 세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의 저자인 유진 피터슨에 의하면, “영성 신학”의 핵심은 “기독교적 삶”(23쪽)이다. 그것은 “목적과 수단의 일치, 우리가 하는 일과 그 일을 하는 방식 사이의 일치에 대해”(575쪽), “평생에 걸쳐 세세히 주의를 기울이는 실천”(575쪽)이다. 이는 영성 신학을 현실과 무관한 소위 ‘영적’인 고양을 위한 신학으로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바로 잡아주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구원은 ‘역사적’인 것


홍해 사건 직후 모세의 노래(출15)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결코 구원을 영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모세의 노래는 분명 역사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일어난 그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319쪽). 저자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개별화된 영혼, 인간 내면성과 관련 있는 영적 상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컬을 때만 거의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북미 기독교인들의 습관을 비판적으로 기술한다. 구원의 대상인 전인(全人)의 일부인 영혼조차도 역사적 영혼인 것이다. “구원은 물론 영혼의 상태를 다룬다. 그러나 기억하자. ‘영혼’(soul)은 모든 것을 합한 단어다. 경제와 정치, 과학과 지리, 문학과 예술이 다 들어가 있는 역사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없다.”(319쪽).


결정적인 것은 악과 죄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 - 선지자적 비관주의 비판


“악은 편재하고 전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고 흔하게 일종의 도덕적/영적 냉담에 빠지고, ‘어쩔 수 없다’는 질병에 걸리며, 일부는 완전한 불신앙에 빠지게 된다.”(320쪽). 많은 사람들이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하는 확신에 찬 지식을 갖지 못한 채, 곧 구원에 대해 확고한 역사적 이해를 갖지 못한 채 소심하게 살아간다(320쪽).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진실인 것이 우리에게도 진실이다.”(321쪽).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이 역사는 구원으로 규정된 역사이다. 비록 구원으로 규정된 역사에서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죄가 결정적이지 않고, 구원이 결정적이다(317쪽).


저자의 이런 통찰은 소위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역사에서 우리는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정의를 외치지만, 인간의 죄성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 정의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갖고 임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죄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이 결정적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인간 삶의 세세한 문제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율법


신명기 율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사는 삶의 세세한 문제들에 그렇게도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진다는 것은 지금 보아도 참으로 인상적이다.”(460쪽). 율법이 인간 삶의 세세한 문제들에 그렇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인간 삶의 매우 중요한 토대인 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계실 것인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심판이 아닌 구원 - 역사를 길게 보고 기록을 남겨야 할 이유


저자의 통찰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신명기 말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통찰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신31:16-21)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모세야, 한 가지 더 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이다. 이 백성은 네가 사라지자마자 성(性)과 다산(多産)을 숭배하는 난잡한 가나안 종교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이 마지막 메시지를 기록해 두라. 그것을 아이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노래로 만들어라.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 노래의 파편들을 모아 훗날, 네가 출범시켰으며 지난 40년 동안 그토록 신실하고 훌륭하게 섬겨 온 이 거룩한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게 하라.”(465쪽).

 

하나님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극에 달했던 조부 므낫세와 친부 아몬을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요시야는, 주전 622년, 대대적인 성전 수리 작업 중에 발견된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이라는 두루마리, 곧 신명기를 발견하여 종교개혁 운동의 준거로 삼았다. 그리고 요시야가 개혁운동을 시작한 지 4년 후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고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했는데, 예레미야가 사용한 언어는 그 신명기 두루마리의 어구들과 많은 유사성이 있었다. “분명 신명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멸절의 위기에서 건져 내시려고 요시야와 예레미야의 삶에서 사용하신 텍스! 트였다.”(434쪽). 요시야가 애굽 왕 바로느고와의 전투에서 죽을 때까지 13년 동안 요시야와 예레미야는 함께 신명기에 의거하여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 유다는 하나님께 계속하여 불순종하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요시야가 이끌고 예레미야가 설교했던 그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을 엄청난 정치적 패배와 노예화와 포로 생활에서도 살아남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백성을 흥왕하게 만들었다. 신명기를 텍스트로 사용한 요시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 후 500년 동안에도 계속 예배와 사랑의 공동체로 남을 수 있도록 (재)형성시켰고, 마침내 훗날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공동체로서 다시 재형성될 때까지 숱한 고난을 헤쳐 나가고 숱한 공격을 이겨 내게 만들었다.”(435-436쪽).


신명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때 그것에 대한 ‘심판의 증거’로만 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더라도 먼 훗날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징계가 임했는지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원의 본문’으로 삼는 데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진정한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쓰고 치열하게 토지 정의 운동을 하다가 타계한 1897년 이후, 전 세계 토지 정의 운동은 약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비록 1960년대 초에 거칠게나마 완역본이 나왔으나 곧 금서로 분류되어 일반에게 알려지지 못했고) 헨리 조지 사후 100년 만에 『진보와 빈곤』이 완역되었고 그 책에 기초하여 다시 토지정의 운동은 불타오르게 되었다.


역사를 길게 보고 기록을 남기자. 책도 좋고 다큐멘터리 영상물도 좋다. 토지 정의 운동의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의미를 기록으로 남기자. 그렇게 하면 앞으로 혹시라도 이 역사가 토지 불의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지라도 그 후 언젠가 후손들이 우리가 남긴 기록을 보고 자신들이 당하는 수난의 역사의 핵심 이유 중에 바로 토지 불의가 있었음을 깨닫고 다시 토지 정의의 길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토지 불의 가운데 심판을 받게 되는 역사의 단기적 측면에서는 토지 정의 운동이 비록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역사의 장기적 측면에서는 진정 성공이며,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