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정의

멕시코 혁명과 사파타 - 토지와 자유

강산21 2006. 7. 26. 12:38

star02_green.gif세계 토지사

 

■ 멕시코 혁명과 사파타 - 토지와 자유


멕시코 혁명과 사파타 - 토지와 자유


최근 멕시코 대선에서 우파가 좌파에 대해 신승(辛勝)을 거두었다. 비록 좌파가 졌지만, 우파를 위협할 정도로 좌파가 약진한 역사적 배경은 멕시코 혁명의 사상적 유산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 혁명은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서, 그 기간은 길게는 1910년~1942년으로 볼 수 있다. 1910년은 마데로가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선언하여 혁명을 촉발시킨 해이고, 1942년은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1790만 6429헥타르의 토지(국토 총면적의 9%로 경작 가능한 토지는 대부분 포함)를 분배하고 석유 국유화를 선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혁명을 완수한 카르데나스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카마초가 최후로 미국과 혁명전쟁·토지·석유에 대한 배상 협상을 마무리함으로써 혁명을 완결지은 해이다. 장장 30여년에 걸친 멕시코 혁명 기간 중에 100만 명이 넘는 멕시코인들이 피를 흘렸는데, 이 20세기 최초의 유혈 사회혁명의 주요 의제는 바로 토지 개혁이었다.


혁명직전까지 장기 집권한 디아스는, 대토지를 소유하고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카우디요(caudillo)라고 불리는 지방호족들에게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수탈한 토지를 분배해줌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였다(백종국, 50쪽). 1883년의 토지조사법은, 정부가 지정한 토지 조사 회사들에게 공적인 토지를 조사하게 하고 이들에게 토지 조사 비용으로 조사된 토지의 3분의 1을 주고 나머지 3분의 2도 매우 싼 값으로 구매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고, 또 어떤 토지가, 예컨대 개인 소유 혹은 공동체 소유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법적으로 소유권을 증명하지 못하면 토지 조사 대상 토지로 간주한다고 선언하였다(백종국, 51쪽).


대부분이 문맹인 인디언들이 막연히 점유하고 있던 에히도(ejido)라고 불리는 공동체적 토지들을 포함하여 많은 토지가 토지조사사업의 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심각한 토지집중을 초래하였다. 1881년에서 1889년 사이에는 전체 토지 중 가용 토지의 14%만이 29개 회사나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1894년에는 전체 토지의 20%가 50여 법인들에게 점유되었고, 1910년에 이르면 전체 토지의 97%가 830여 명의 대농장주(hacendados)에게 집중되었다(백종국, 52쪽). 반면에 총인구의 88.4%가 대농장의 농업노동자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이 농업노동자들이 받은 임금은 거의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백종국, 52-54쪽). 많은 농업노동자들이 농장주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그 빚을 대대로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 결과 상당수의 농업노동자들이 대대로 특정 농장의 !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백종국, 54쪽).


이런 비참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핵심적 사회 의제는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멕시코 혁명의 순수 이상주의자인 사파타가, 디아스 정권을 전복하였으나 토지개혁에 매우 소극적인 마데로에게 한 이야기에, 토지의 회복에 대한 멕시코 민중의 갈망이 잘 나타나 있다. 마데로의 임시 관저에서, 카빈총을 잡고 앉은 사파타는 마데로에게 모든 문제의 근원인 토지문제에 대해 신속한 조치를 촉구하였지만, 마데로는 미온적으로 반응하였다. 이에 사파타는 마데로에게 만일 사파타 자신이 무장한 채, 비무장 상태인 마데로의 금딱지 시계를 빼앗아 간직하고 있다가 후에 다시 만났는데 이제는 둘이 다 똑같이 무장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마데로는 사파타에게 자기 시계를 돌려달라고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마데로는 맞장구를 치며, 더 나아가 떫Ⅷ灌사파타에게 그동안 그 금딱지 시계를 사용한 비용도 요구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사파타는 말했다.


[바로 그것이 모렐로스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디아스 시절에 몇 안되는 농장주들(hancendados)이 마을의 토지들을 강탈했습니다. 이제 나의 병사들은, 무장한 농민들인데, 나에게 그들이 원하는 토지의 회복을 즉각 실천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백종국, 112쪽)


사파타는 농민에게 토지를 돌려 줄 것을 약속하였으나 집권 후에 그것을 배반하고 또 사파타 농민군에 대한 와해 공작을 편 마데로에 대항하여, 대지주들이 찬탈하였던 토지는 원래의 소유자였던 마을이나 농민들에게 즉각적으로 반환될 것이라는 아얄라 강령을 발표하고 무장 항쟁에 돌입했다. 사파타는 토지가 없으면 자유도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토지와 자유를 역설하였다.


[‘땅과 자유’라는 엠블렘은 아얄라 강령 자체였고 사파타의 핵심 이념이었다. 자유는 누구에게나 그러했듯이 혁명정신의 수사였고 그것은 땅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따라서 땅은 혁명에서 그가 선택한 믿음이자 이상이었다.](임상래, 214쪽)


토지 국유 원칙을 명시함으로써 토지 개혁의 근거가 된 1917년 멕시코 혁명 헌법 제27조 신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파타는 1919년, 카란사 정권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토지와 자유를 열망한 사파타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유지 에히도에 대한 원주민 인디오의 권리를 보장한 헌법 제27조를 무효화시킨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1994년 1월 1일,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멕시코 혁명의 영웅인 사파타의 이름을 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무장봉기한 것이다.


그런데 에히도는 상업농 중심의 사유지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라구나 에히도의 면화생산은 9000톤이나 감소하였고, 유카테칸 에히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같은 기간에 에네켄 섬유의 생산이 4만 5000톤이나 감소하였다(백종국, 480쪽). 그러므로 에히도가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평등 토지권의 정신을 살리면서 동시에 생산성의 향상도 도모할 수 있는 방식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경제사상가인 헨리 조지가 주창하고 러시아의 대문호인 레프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역설한 지대공유제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대 공유제의 핵심원리는 농지의 경우, 첫째, 각 농가가 자신이 원하는 토지를 경작하되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 및 면적에 따라 차등적인 지대(地代: 연간 토지사용료)를 모두 마을 공동체가 환수하여 공유함으로써 평등 토지권의 이상을 달성하고, 둘째, 각 농가가 노동한 만큼 그 노동 생산물에서 지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그 생산자 가족이 가짐으로써 노동생산물에 대한 진정한 사유재산권의 원리를 충족시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대 공유제의 원리는 농지뿐만 아니라 도시 상공용지에도 적용 가능한 최선의 대안이 된다. 예컨대 멕시코시의 노른자위 땅부터 변두리 땅까지 그 위치에 따라, 그리고 사용 면적에 따라 각 사용자는 차등적인 지대를 정부에 세금으로 납부하여 사회가 공유하고, 그 대신 지대를 제외한 나머지 노동생산물에 대해서는 최대한 개인 소유를 보장하기 위해 생산·유통·소비·소득·부에 대한 각종 세금을 감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정의와 효율을 모두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지대공유제의 둘째 원리가 노동생산물에 대한 마을 공동체의 공동 분배 방식을 단호히 거부한 사파타에게서도 일정정도 나타나 있다. 사파타가 원한 것은 공산주의적 생산과 분배는 결코 아니었는데, 이 점은 그가 무정부주의적 급진사상가였던 안토니오 디아스 소토 이 가마와 나눈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사파타, 당신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무어냐? 설명해봐라.

-예를 들어 모두 함께 생산하고 결과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다

-누가 나누는가?

-대표자 또는 마을이 구성한 위원회이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만약 나에게 그런 일(내가 일해서 얻은 것을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이 일어난다면 그자가 누구이든 나에게 총알세례를 받을 것이다.”](임상래, 213-214쪽).


북미자유무역협정으로 무효화된 멕시코 혁명헌법 제27조의 토지 국유 원칙의 이상, 또 에히도를 상징으로 하는 원주민 인디오의 평등 토지권의 이상, 그리고 ‘토지와 자유’에 대한 사파타의 이상을 실현하면서 생산성 향상까지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바로 지대공유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무너져 버린 멕시코 혁명의 성과가 앞으로 피 흘림이 없는 무혈 명예혁명의 방식으로, 그리고 지대공유제라는 최선의 방식으로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도서

백종국, 『멕시코 혁명사』, 한길사, 2000.

임상래, “에밀리아노 사파타: '토지와 자유'의 혁명”, 이성형 편,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 까치글방,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