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글 좋은글

이층 냄비

강산21 2001. 4. 8. 00:22
경비아저씨 토니의 크리스마스이브새벽에겪은한일화 혼자 살면서 찬밥을 먹는 일이 잦아졌다. 밥을 아무리 적게 해도 찬밥은 남았다. 올 겨울은 너무나 추워서 찬밥이 거북할 때가 많았다. 흔한 전자레인지도 없는데다 밥맛이 달라질까봐 섣불리 데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는 분이 외국으로 이사를 가면서 살림은 다 두고 가니 갖고 싶은것 있으면 골라보라고 했다. 먼저 찜해두면 다른 사람 안 주고 날 주겠다고 우선권을 주었다. 마침 밥공기가 깨진 참이라 공기를 달라고 했다.그리고 뚝배기 하나, 공기에 맞춰 국그릇 하나, 또 뭐지? 음, 예쁜 찻잔, 앉은뱅이 나무 식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찜 냄비를 골랐다. 며칠후 막상 그 집의 짐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닫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머!저 전자동 세탁기를 달라고 할 걸, 난 수동식 세탁기를 쓰는데… 아니 저 TV는 내 것보다 훨씬 화면이 큰데,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아이구 난 비디오도 없는데….’ 난 그저 내게 없는 것만 생각했고 더 좋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어차피그것들이 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이 떠올랐다. ‘그래, 난 혼자니까 빨래도 많지 않아 수동식도 쓸만 해, 내 방은 작은데 큰 화면이오히려 버겁지, 영화 너무 좋아해서 거기 빠질까봐 비디오도 안 샀는데 갖다놓으면 아마 되는 일 하나도 없을 거야.’ 그렇게 꿰어 맞추며,물건이란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일렀다. 하긴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 그것들이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난히 추운어느 날 마침 찬밥이 있길래 밥을 쪄보기로 했다. 아랫쪽엔 물 약간, 윗쪽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찬밥을 넣고 가스 레인지에 얹은 지 얼마 되지도않아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밥을 퍼보니 새 밥과 거의 진배가 없다. 찬밥 해결의 순간이다. 내게 잠시나마 아쉬움을 주었던 그 놓쳐버린물건들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순간은 찬밥 먹을 심난함에서 벗어난 기쁨이 더 컸다. 밥을 데우는 그 하찮은 일을 통해 나는 생활 속의작은 충분함이, 값진 그 무엇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깊은 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이층 냄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복희 / 월간 샘터 2001.4

<따뜻한 세상만들기>는 작으나마마음을 나누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든 방입니다. 따뜻한 글을 싣고서로 좋은 글을 공유하며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이제 시작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열린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지기 드림

이층 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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