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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에스페로내과의원 박화종 원장이야기

강산21 2001. 2. 17. 10:53
경비아저씨 토니의 크리스마스이브새벽에겪은한일화

포항 에스페로내과의원박화종 원장 이야기

묵직한 신앙, 천진한웃음, 따뜻한 손길

"아예 종일 기다릴 작정 하고오지예. 첨엔 지겨웠는데 이젠 별루 그렇지두 않아예." 60이 막 넘어 보이는김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한다. 포항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에스페로내과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김 할아버지처럼 보통 2-3시간 기다리는 걸예사로 여긴다.   

별로 넓지 않은 환자대기실 한 가운데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커다란 TV 수상기는 대기실을 가득 메운 환자들의 시선을한데 묶어 놓는, 이 병원에서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장치다. 이 병원의 또 한 가지독특한 점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연륜과 인내심은 정비례한다는 속설이 입증되는 곳이기도 하다.

병원인지 양로원인지?

에스페로내과의원은 환자들의 몸보다는마음을 치유해주는 병원이다. 넉넉하고 푸근한 웃음이 가득한 박화종 원장(50·포항제일교회집사)은 우선 외모에서부터 환자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청진기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본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증세를 요모조모 자세히 물어보기도 하고 일일이 설명도해준다. 그러더니 덜컥 "할머니, 뭐 속상한 일 있어요?" 하고 묻는다.드디어 외도(?)로 이탈하는 순간이다.

금새 한숨을 푹 내쉬는 할머니는가슴 속 깊은 곳에 켜켜이 묵혀뒀던 한(恨) 덩어리를 풀어 놓는다. 10분도 좋고 20분도좋다.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들어주는 박 원장이나, 대기석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는 동료 할머니 환자나, 이 순간은 모두 과거로 돌아가 함께아픔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 버린다.

타임머신을 타고 먼 나라로 떠났던모두는 잠시 침묵이 흐르는 틈새를 타고 현실로 돌아온다. "할머니, 이젠 술그만 묵고 담배도 좀 줄이고 그라소" 하면서 할머니 등을 툭툭 치는 박 원장에게"평생 빨던 담배가 그리 쉽게 끊어지나?" 하면서 가볍게 눈을 흘긴다."그래도 안 죽을라믄 말 들어야지". 주사도 맞지 않고 약봉지도 받아들지않았지만, 오고가는 적당한 반말 속에서 어느새 아프던 곳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같은 표정이다.

진료 시간은 한(恨) 풀이 시간

  그렇게 몇 명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을 진료하다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다. 기다림에 지친 기자는 진료실을들락날락. 머쓱한 표정으로 미안해 하는 박 원장과 함께 식당 한구석에 앉았다. 환자한 사람 진료하는데 소요시간이 왜 그리 긴지 물어보았다. "내과환자는 만성적인병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위장병 심장병 고혈압, 뭐 이런 병들은 거의 신경성이많죠.

90%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라고 봐도좋습니다. 정작 의사가 주는 약이나 주사는 5% 내지10% 정도 역할밖에 안 되는 셈이죠.그거 보다는 마음을 풀어주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마음을 풀어주는데 최고 좋은방법은 무조건 얘기를 들어주는 거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기 속내를 털어 놓으면서마음의 병을 조금씩 조금씩 자가치료해 나가는 셈입니다."

"그래서 어디 돈 벌겠어요?"불쑥 돈 얘기를 꺼냈다. "돈요? 벌기는 많이 벌죠. 하지만 그만큼 쓰는 데가많아서 제대로 모으지도 못했습니다." 남들은 병원에 환자가 그득 하니까 꽤돈을 벌 거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모두들 인내심이 강한 환자들의 순서가 밀려있을 뿐 실제로 환자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이제서야 환자들이 묵묵히 오랜시간을 참고 기다리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기다리는 동안은 지겨울 지 몰라도, 자기순서가 되면 너무나도 꼼꼼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게다가 하고 싶은 얘기 맘껏할 수 있으니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환자들에게는 좋지만 간호사들에게는죽을 맛이다. 보통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진료시간을 넘기기 일쑤. 간호사들도 처음엔적응이 안됐지만 이제는 저녁 늦게 퇴근하는 걸 예사로 안다. 오히려 "원장님저러다가 당신 몸 상하면 어쩌나 싶다"고 되레 걱정을 한다.

8년째 모자원, 양로원 방문 진료

단지 진료시간이 길다고 해서 건강을걱정하는 건 아니다. 진료가 끝나면 가야 할 곳이 또 있다. 93년 병원을 개원한 이래지금까지 8년 동안 한 달에 두 번은 꼭 찾아가는 곳이 포항모자원. 일 나간 젊은엄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놀아주다가 밤늦게 퇴근한 엄마품으로 돌려보낸다. "아빠 없이 자라는 아이들, 그 아이들 엄마의 얼굴에는알게 모르게 외로움이 묻어 있죠. 그 한구석을 채워주고 싶습니다." 이 역시처음엔 힘들어 하던 간호사들도 이제는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진료장비를 챙긴다.어디 이뿐인가. 한반도 동쪽 구룡포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석병양로원으로 달려가그 곳 노인들을 진료하고 그들의 고달픈 인생 얘기를 들어준다. 아가페 사랑의집이라는양로원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저는 그저 도구에 불과할뿐입니다. 눈에 띄면 내 일이구나 하고 달려들 뿐이죠. 힘들지 않습니다. 즐겁습니다."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를 아주 가볍게 얘기하는 박 원장은 일년에 1천만원 이상을여기에 쏟아붓는다. 돈을 모으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전에는 약국을 함께 해서 약품지원이 수월했는데, 의약분업 이후에는 약품 지원도 녹록치 않다. 다행히 남는 약을건네주는 제약회사, 보험카드 환자는 무료로 도와주는 동료 약사가 그에겐 큰 힘이다.

친정 어머니가 한밤중에 갑자기쓰러졌을 때 단박에 박 원장을 급하게 찾았다는 모자원에서 알게 된 한 애기 엄마의자그마한 얘기를 들으면서, 이 일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 새삼 깨닫게된 그에게, 모자원과 양로원 방문진료는 어떤 일이 있어서 결코 멈출 수 없는 소중한사역이다.

의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환자 곁을떠나선 안된다

뜬금없이 의약분업에 대한 견해를물었다. 천진하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짐을 읽었다. 그의 태도는 분명했다. "어떤일이 있어도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나선 안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꾸 병원을찾아오는데 단체에서 압력을 가해 병원 문을 잠시 닫았을 때 그 괴로움은 말할 수가없었고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과거에는 의사라는직업이 성직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의료서비스 업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사회에서는더 이상 성역으로 보지 않는데 의사들은 여전히 권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괴리가너무나 큽니다." "직업 면에서는 의사도 수많은 직업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이것을가지고 남을 직접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봉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모릅니다." 거침없이 얘기하던 그가 이 대목에서 다시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이왕이면 그랜저라고하지 왜 하필 에스페로야?" 하고 병원 이름의 뜻을 묻는 이들이 간혹 있단다.'에스페로'는 '희망' '소망'을 뜻하는 에스페란토어. 에스페란토는 '세계 모든 인류가형제 자매라는 정신으로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직접 의사를 소통함으로써 언어를통한 세계평화를 구현하고자 힘쓰는 운동'. 박 원장은 77년부터 에스페란토 운동의정신에 공감하고 몸소 실천하는, 신앙과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는, 바로 운동권(?)의사였다.

<따뜻한 세상만들기>는 작으나마마음을 나누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든 방입니다. 따뜻한 글을 싣고서로 좋은 글을 공유하며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이제 시작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열린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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