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글 좋은글

2000년 2월 22일 2시

강산21 2001. 2. 12. 01:39
경비아저씨 토니의 크리스마스이브새벽에겪은한일화

<따뜻한 세상만들기>는 작으나마마음을 나누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든 방입니다. 따뜻한 글을 싣고서로 좋은 글을 공유하며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이제 시작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열린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지기 드림

2000년 2월 22일 2시

내가 몇 년을 두고 2000년의 그 약속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듣는 이들은 대개 빙긋이 웃었다. 10여 년 전, 나와 제자들은 2000년 2월22일 2시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중학생들의 교실에 들어가 보면 학년초에는 교실 공간이 넉넉한데, 학년말이 되면 교실 뒤칠판까지 의자가 닿을 정도로 몸이 불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아이는 1년에 10cm 이상 키가 크기도 한다. 같은 교실에서 1년 동안부딪히며 지내다 보면 새록새록 정이 들어, 학생들이나 담임 선생이나 헤어지기 아쉽기 마련이다. 다시는 똑같이 그 자리 그 교실에 앉을 일이없겠지 하고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워져서 나중에 다 큰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4년에 걸쳐 240여 명의 학생들과한 약속이었다.
나는 그간 학교를 그만두고 캐나다에 이주해 살고 있었는데, 2000년 2월 22일이 점점 다가오자 과연 몇 명이나 10여년 전의 그 약속을 기억하고 나타날 것인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약속한 날을 며칠 앞두고 미리 귀국해 동생 집에 머무르면서, 가장 근사치에가깝게 맞춘 사람에게 자장면을 사주는 내기를 했다. 열두 살인 조카는 240명, 열여덟 살인 조카는 120명, 40대인 동생 내외는 각각60명, 40명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어릴수록 순수하다는 것일까? 당사자인 나는 막상 점칠 수가 없었다. 스무 명만 나온다고 해도 기쁠 것이라생각하며 기도까지 했다. ‘주님, 제가 교단에 섰던 15년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치며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내 아이들의 선생님이 이렇게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했습니다. 제게 제자들과 만나는 기쁨을 상으로 허락하여 주소서.’
그간 학생들과 만나기 위해 얼마나맘 졸여왔는지. 특히 약속한 날을 몇 달 앞두고 받은 복막염 수술이 잘못 되어 세 차례나 수술하고 병원을 들락거리게 되자 무척 걱정이 되었다.‘약속을 못 지키면 안 되는데….’ 2년 전에 암 수술을 받고 눈앞이 캄캄했을 때도 학생들과의 약속을 못 지킬까봐 그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다행히 한 달 전부터 진통제 없이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태평양을 건너가는 것이 못미더웠는지 막내딸이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의 약속에대해 미리 알고 있던 동생이 제자들에게 나누어 줄 자그마한 책을 만들어 때맞추어 학교에 갖다 놓았다. 그 책 속엔 학생들이 옛날에 쓴 일기들이들어 있었다. 나는 소풍 갔을 때 찍은 사진이랑, 연극할 때 찍었던 사진 등 아이들의 사진을 갖고 갔다.
미리 12시쯤 약속 장소인학교에 도착해 교무실에서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너무 긴장이 되어 두근대는 가슴으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만약에 한 명도 안나온다면 어쩌나? 제발 한 명만이라도 나와주었으면….’ 그러나 거기엔 밝은 얼굴의 싱그러운 청년들이 꽃다발까지 들고 둘씩 셋씩 무리 지어 서있었다.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선생님이 되었다.
“여러분들과의 약속이 투병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한 가장 큰 힘이었어요.여러분들은 모두 이 사회의 모범생이에요. 약속을 지켰으니까요.”
그날 나는 스무 명의 제자를 만났고, 며칠 후 열다섯 명의 제자를 더만났다. 그 중에는 이미 어엿한 가장이 된 사람도 많았다. 양복을 단정하게 빼 입은 백화점 판매사원, 휴가 받아 나온 씩씩한 군인, 벤처기업의주임,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학생, 밴을 몰고 다니는 패션회사의 판매주임, 은행원, 제대하고 복학한 대학생, 그리고 내게 미사시간에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해준 신부님도 있었다. 제자들은 회갑 때 근사한 잔치를 열자며, 한 기에 대표로 한 명씩만 축가를 불러도 열 명은넘겠다고들 했다. 말만 들어도 흐뭇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맣고 따뜻한 흔적으로 그냥 그렇게 남고 싶다.
글쓴이 신영봉님은 안양 신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1995년 캐나다로 이주 했습니다. 현재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있으며, 얼마 전 제자들과 따뜻한 추억을 엮은 <어떤 약속>이란책을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