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글 좋은글

법과 인간 사이에서

강산21 2001. 2. 11. 00:08
경비아저씨 토니의 크리스마스이브새벽에겪은한일화

<따뜻한 세상만들기>는 작으나마마음을 나누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든 방입니다. 따뜻한 글을 싣고서로 좋은 글을 공유하며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이제 시작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열린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지기 드림

법과 인간사이에서



밤늦은 시각 강남의 한 카페 앞, 링컨컨티넨탈 운전석에는 20대쯤의 여자가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수다를 떨고있었다. 그때 바짝 마른 소년이 조용히 접근했다. 길고 짙은 눈썹에 뾰족한 콧날이었다.

수은등에 비친 백짓장 같은 그의 얼굴은병색이 완연했다. 소년은 손에 쥔 칼을 그녀의 목에 댔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운전석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잠시 뒤소년이 모는 외제 고급승용차는 유유히 사라졌다. 얼마 뒤 서울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일 년이흘렀다. 법원 마당의 누렇게 시든 잔디가 벌써 한해의 끝을 예고하는 듯했다. 저녁의 법정으로 어둠이 밀물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제일마지막으로 변론을 하고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엄 변호사님, 잠깐만요. 한 사람 변호해 주셔야겠어요.”
K 부장판사가 나를 불러세웠다.

“저 사람인데요, 아프다고 해서 임시로 석방해 줬더니 재판에 통 나타나질 않다가 오늘에야 검찰에서 잡아 왔어요. 담당국선변호사가 나오지 않아서 그러는데 변호를 해 주시죠.”

텅 빈 방청석 앞에 한 소년이 괴로운 듯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바로 일년 전 강남에 출몰했던 괴한이었다. 법원측은 아픈 사람을 구속시키기도 딱하고 그렇다고 보내면 도망갈 것 같아 오늘 기어이 재판을 끝내려는것이었다. 재판장은 내가 사건기록을 보고 그 소년과 얘기를 끝낼 때까지 법대에서 배석판사들과 함께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형광등 불빛이어슴푸레한 법정 밖에서 기록을 들추며 소년과 얘기했다.

“왜 그랬니?”
“찢어지게 가난해요. 몸은 아프고 치료는 받아야해서요….”
기록에 소년은 말기 신부전증 환자로 되어 있었다. 수시로 피를 걸러야 연명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단칸 전세보증금을 빼서 아들병원비를 대는 중이었다.
“사람을 해쳤니?”
“그런 적은 없어요.”
“훔친 돈은 어떻게 썼어?”
“치료비 하려고 보관했다가형사들에게 뺏겼어요.”
“교도소에서 오래 살았던 전과가 있니?”
“잡혀간 적은 있는데 징역은 안 살았어요. 돈이 궁해서 했지만강도짓이 나쁜 건 알아요.”
그는 법정에서도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재판은 아버지 같은 K 부장판사와 아들 같은 소년의 대화로진행됐다.

“수사기록에 있는 게 전부 맞단 말이지?”
“그래요.”
“피해자 아줌마 한 사람이 손가락을 다쳤다며 진단서를제출했는데 어떻게 된 거니?”
재판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법은 이럴 때 현실과 멀어진다. 아무리 상처가 경미해도 그 순간 소년은강도상해범으로 변하고 10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을 수 있다.
“그 아줌마가 당황해서 차 문 사이에 손가락이 꼈어요.”
소년이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래도 강도상해죄가 되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재판장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재판장은손에 턱을 받치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이윽고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안됐지만 다음 재판 때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할 거야.각오해라.”

재판장은 힘들게 잡아 온 그를 돌아가라고 했다. 게다가 앞으로 중형을 선고한다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순간 나는 소년에게도망가라는 암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재판장을 보며 소설가 김홍신 씨에게 들었던 기억 속 한 장면을 떠올렸다.

도망다니던 살인범 아들이 지쳐서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공소시효가 끝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법은 살인범도 15년만 지나면 용서하는 것이다. 이제 몇시간만 지나면 자유인이 되는 순간 형사가 찾아왔다. 윗층에 숨은 아들이 구멍을 통해 형사를 보고 있었다. 아들이 없다고 변명하는 어머니의 얼굴은차라리 간절한 애원이었다. 이윽고 형사는 아들이 돌아오면 알려 달라며 일어섰다. 위기를 넘긴 아들은 창문 틈으로 돌아가는 형사의 뒷모습을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유유히 걷던 형사가 잠시 멈추더니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자유를 축하한다는 몸짓이었다. 형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모든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법과 인간 사이를 형사는 그렇게 해결한 것이다. 늦은 시간 법정, 재판장의 인정 어린 얼굴에 그 형사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재판이 끝나고 텅 빈 법정에 소년 혼자 서 있었다.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이거 차비라도 하거라.”
내가약간의 돈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순간 소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저씨 나 이 돈 받으면 안 돼요…,강도잖아요.”
소년의 마지막 말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엄상익칼럼 좋은생각20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