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고종석 칼럼]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강산21 2005. 7. 3. 13:09
[고종석 칼럼]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영문학자 이양하씨의 ‘경이, 건이’라는 글이 있었다. 앞집에 사는 친구의 두 아이에 대한 얘기다. 자신과 친구 아이들 사이의 일화를 다소 호들갑스럽게 기록한 이 수필에 따르면, 그 시절 아이들 아버지는 아우 되는 건이 쪽에 더 정을 주었던 모양이다.

물론, 재미를 위한 과장을 곁들인 글이어서,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은 없겠다. 한참 뒤, 나는 그 글의 경이와 건이가 고건 전 총리 형제고, 이양하씨의 친구가 고 건씨의 선친인 철학자 고형곤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글이 쓰일 당시 세 살짜리 귀염둥이였던 아이는 자란 뒤 한국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나이가 되었다.

대통령을 제외한 고위직을 두루 거쳤고, 지난 해 두 번째로 총리직에 있던 시절엔 미증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으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고건씨 중심의 정계개편설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고 건씨가 다음 대통령감으로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해 9월 이래 그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감 1위로 꼽히고 있다. 고 건씨 자신도, 드러내놓고 의중을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출마 가능성을 부정하지도 않고 있다.

높은 선호도 탓인지 민주당은 노골적으로 고 건씨에게 구애 중이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도 문호는 열려있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고 건씨를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설까지 나오고 있다.

고 건씨에 대한 지지는 단지 높은 데 그치지 않는다. 선친의 고향이 전북이고 그 자신 젊은 시절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던 것과 관련 있는 듯 호남 쪽의 선호가 다소 높긴 하지만, 그에 대한 지지는 다른 잠재적 대선 후보들에 견주어 지역적으로 한결 고르다. 유권자들이 그를 선호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견주어 안정감이 있다는 말도 나오고, 공직 생활 내내 청렴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행정가로서의 능력’도 거론되고, 오랜 관직 생활을 통해 축적된 ‘경륜’이라는 것도 회자된다.

여론이라는 것은, 특히 한국의 여론이라는 것은 워낙 휘발성이 강해 그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그가 유권자들의 변덕을 잘 관리해 청와대의 다음 입주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씁쓸하다.

고 건씨에 대한 비토 여론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그의 긴 행정가 이력이 서로 적대적인 정치세력들에게 차례로 떠받쳐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력은 일반적으로 증오의 연료가 되기 쉬운데, 고 건씨의 경우엔 외려 친밀감의 요소가 된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서로 다른 정파에 고용되면서도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박정희가 임명한 도지사이자 청와대 비서관이었고, 전두환 정권의 장관이자 여당 국회의원이었고, 노태우가 임명한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또 김영삼 정권의 총리였고, 김대중 정권의 여당 출신 민선 서울시장이었으며, 노무현 정권의 첫 총리였다.

한 때 군사정권의 적수였던 김영삼 김대중씨가 집권을 위해 군사쿠데타 세력과 연합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고 건씨의 이력이 뭐 흠잡을 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도 고 건씨의 그 화려한 이력이 압도적으로 굴신(屈身)의 결과라는 사실은 지적하기로 하자. 그리고 그가 몸을 굽힌 것은 국민들에게가 아니라 최고권력자에게라는 사실도 지적하기로 하자. 평생을 최고권력자에 대한 굴신으로 일관한 사람을 한 나라의 대통령감으로 여기는 여론이 나는 불편하다.

-5ㆍ18적자 자임 민주당 처신 딱해

특히 고 건씨에게 목을 매고 있는 듯한 민주당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5ㆍ18의 적자를 자임하는 정당이 전두환의 각료에게 목을 매는 것은 마땅히 겸연쩍어 해야 할 일이다.

고 건씨의 대망을 변죽울리고 있는 듯한 다산연구소라는 데도 마찬가지다. 그 연구소의 이사장이라는 이는 5ㆍ18기념재단의 이사장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명분을 팽개친 정치는 개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