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카드

물고기는 알고있다

강산21 2017. 4. 6. 14:11

 

 

작은 물고기 중에서 이야깃거리가 가장 풍성한 것은 심해아귀다. 1인치의 절반도 안되는 수컷 심해아귀는 작은 덩치를 '뻔뻔한 생존방식'으로 만회한다. 칠흑같은 심해에서 암컷을 찾으면 수컷은 주둥이를 암컷의 몸에 들이박고 여생을 그 상태로 보낸다. 암컷의 어느 부분에 주둥이를 고정하든(심지어 복부나 머리라고 하도),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암컷의 몸과 융합되기 때문이다.

몸무게가 임컷의 50분의 1에 불과한 수컷은 '변형된 지느러미'나 다름없어서, 암컷의 혈액공급에 의존하고 정맥을 통해 암컷과 수정한다. 암컷 한 마리의 몸에는 세 마리 이상의 수컷이 돌출해 있다. 마치 흔적으로 남아있는 부속지처럼 말이다.얼핏 보면, 심해아귀의 사례는 마치 충격적인 성학대 사례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성적 기생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처럼 색다른 짝짓기 방식의 기원을 따져보면 그리 야비하지 않다.

암컷 심해아귀의 밀도는 80만 세제곱미터당 한 마리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수컷이 암컷을 찾는다는 것은 '축구장만 한 크기의 깜깜한 공간에서 축구공 하나를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광대하고 어두운 심연에서 암컷을 만난다는 게 어려우므로, 일단 만나기만 하면 암컷에게 찰싹 달라붙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피터 그린우드와 J.R.노먼이 1975년 <물고기의 역사>를 개정했을 때, 자유롭게 헤엄치는 수컷 심해아귀는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수컷 심해아귀에게 성공적인 기생의 대안은 오직 죽음뿐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심해아귀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워싱턴대학교의 테드 피치에게 문의해본 결과, 현재 전 세계의 박물관에는 자유생활 수컷의 표본이 수백 개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페미니스트들이라면 암컷에게 빌붙어서 거저 먹고사는 수컷을 얄미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암컷 심해아귀는 일종의 지웅동체이며, 수컷은 암컷이 알을 수정시키기 위해 늘 가까이 두는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정이 끝난 수컷은 자신의 내장을 다 포기하고, 종국에는 껍데기와 커다란 고환주머니만 남게 된다.

<물고기는 알고있다> 조너선 밸컴, 에이도스. 2017.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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