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정의의 관계
법은 곧 정의인가? 약간 머뭇거릴 것이다. 이 질문에는 한 가지 흠결이 있다. 법이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은 크게 인간이 만든 법이 있고,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온 자연법이 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해서 만든 법 외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질서가 있다. 이것을 자연법이라고 하는데, 세상의 이치 같은 것이다. ‘사람을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법 이전에 당연히 지켜야 하는 세상의 이치다. 따라서 자연법은 정의롭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지탱해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만든 법을 이야기해보자.
가장 일반화된 인간이 만든 법인 법률을 생각해보자. 법률은 정부나 국회의원이 발의해서 입법 과정을 거쳐 공포, 시행된다. 그렇다면 그 법률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답은 ‘항상은 아니’다. 형법 제250조에 의한 살인의 단죄는 정의롭다. 타인의 생명을 앗아간 사람을 처벌하기 때문이다. 안전띠를 매고 운전하지 않으면 도로교통법에 위반되어 정의롭지 않은가? 살고 있는 곳과 주소지가 다르면 주민등록법에 위반되어 정의롭지 않은가? 정의롭지 않다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후자의 법들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함이지 그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이 다치게 되거나 국가가 행정을 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어 이를 제재하는 것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의회나 정부가 필요한 정책이 있으면 정치적 의사 결정을 내려놓고 법의 형식만을 빌어 규범력을 채우려는 형식적 법치주의가 만연한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의의 개념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기술적인 법 혹은 전통 관습에서 파생되어 나온 법도 있지만 그래도 많은 법률들은 정의를 품에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시장법에는 일반 투자자와 전문 투자자를 구분하고, 일반 투자자에게 해당 금융 상품에 대한 설명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설명 의무가 이행되지 않은 경우 불완전 판매로 금융회사는 감독 당국으로부터 제재 조치를 받고, 금융 소비자로부터 소송에 걸릴 수 있다. 금융 상품의 구조를 잘 모르는 일반인과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전문가 사이의 힘의 균형을 맞추어주기 위한 것이다.
독립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있다. 독립 유공자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국가가 부여하는 일정한 혜택이 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해 혜택을 받는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그러한 영전을 허락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이 다수의 이익에 헌신했다면 이를 보상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재정과 관련하여 법률로 국가가 GDP 대비 몇 퍼센트 이상의 채무를 지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고 하자. 이것도 정의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갸우뚱할 것이다. 이 규정도 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누구를 위하여? 후대를 위해서다. 국가가 30년짜리 국채를 팔았다고 하자. 그 돈으로 30년 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데 국채를 팔 때 태어난 아이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부모세대는 이미 늙어서 생산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으니까. 정의로운가?
<법의 지도> 최승필, 헤이북스, 2016.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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