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가 살린 목숨들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멎은 뒤 지금까지 60년 동안 군대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의 수가(군대 용어로 '비전투 인명손실'이)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5,000명을 제외하고도 거의 6만 명에 육박한다. 한국군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도 매년 1,000명의 군인이 죽어나간 것이다. 이라크 전쟁 9년간 미군 사망자 수를 대략 4,500명으로 잡으면 연평균 희생자 수가 900명인데, 한국군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이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이다.
죽은 이유도 참 다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병들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고, 맞아 죽고, 자살하고, 교통사고로 죽고, 산사태로 죽고, 눈사태로 죽고, 홍수에 죽고, 일사병으로 죽고, 가지가지로 군인들이 죽어나갔다.
1956년 2월 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을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에서는 제설 작업을 하던 소대장과 사병 8명이 눈 속에 얼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는 등 모두 59명이 폭설로 사망했다. 당시만 해도 군대에서 후생사업이란 명목으로 숯을 만들어 내다 팔아 간부들의 월급을 보충했는데, 숯 굽던 임시건물이 무너지거나 눈에 파묻혀 그 안에 있던 장병들이 질식사한 것이다. 인명피해의 규모만 따진다면 천안함 사건보다 더 큰 피해가 났음에도 사단장은 인사조치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설에 고생이 많았다며 표창장을 받았다. 그 때 만일 제대로 된 인사조치가 내려졌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박정희도, 박근혜도 없었을 것이다.
2006년 군의문사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식이나 형제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위원회에 시간을 접수한 사례는 600건에 불과했다. 군대에서 죽음을 당한 사례 중 겨우 1% 정도만이 뒤늦게라도 진상규명을 요구한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군대에서 발생한 모든 죽음이 있을 수 없는 죽음이고, 의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건 중 1건 정도만 진상규명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나머지 사건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결과를 기다릴 수가 없는데 괜히 수십 년 전의 일로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식 곁으로 일찍 떠난 결과,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할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600건의 사망사고 중 중복, 병합, 각하된 사건을 제외한 579건 중 58%인 334건이 비교적 최근인 1980년대 이후 사망자였다. 그 전체 인원수는 1만 1,180명으로 1954년 이후 전체 사망자 6만 1,424명의 18%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대중 강연을 다닐 때면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달라올랐던 분위기는 금방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 버린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면 이명박, 박근혜가 연달아 집권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면 민주화돼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은 없단 말인가. 우리는 민주화가 남긴 가장 중요한 성과를 잊고 살아왔다. 군대 간 자식들을 부모 가슴에 묻어야 했던 죽음의 시대를 끝나게 했다는 점이다. 1988년 민주정권 출범 이후 군 사망자 수는 계속 줄어들어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르면 120~130명 수준으로 떨어져 현재에 이른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에 비하면 민주화는 군대 내 사망자 수를 10분의 1 이하로 줄였다. 강제 징집된 병사들을 대상으로 밀정 노릇을 강요하다 6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낸 녹화사업 같은 것이 중단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는 꼭 데모하다 잡혀간 것이 아닌 평범한 젊은이들을 매년 1,000명이 넘게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냈다.
군사정권 시절 군대 내에서 엄청난 죽음의 행진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이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직후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제정한 대표적인 유신악법인 '군사기밀보호법'은 사실상 군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기밀 범주에 묶어놓았을 뿐 아니라, "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텔레비전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죄를 범한 자는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할 수 있도록 하여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다.
군대 내에서의 사망사고가 줄어든 데에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한 맺힌 몸부림이 크게 작용했다.
(중략)
군사독재 시절 군대는 성역이었다. 그때는 군대에서 사람이 떼로 죽어나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내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에야 군대에서의 사건과 사고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민주화 이후 군대 내에서 사고가 갑자기 급증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민주화를 비방하는 수구 세력들은 민주화 이후 인권이니 뭐니를 찾다 보니 군대에서 군기가 빠져서 사고가 빈발하고, 남북화해니 민족공조니 떠들다 보니 주적 개념이 사라져 사고가 급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군기가 바짝 들고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목 놓아 외쳤던 유신군대에서는 군기가 빠졌다는 민주군대에 비해 열 배도 넘는 젊은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군사정권 시절과 민주화 이후를 비교해볼 때 한국군의 병력이나 구조가 크게 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달라진 것은 민주화에 따라 군이 더 이상 성역이 아니게 되어 민간사회가 군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군대에서 사람이 죽으면 '개 값'만도 못했던 것이 이제 이등병의 죽음에 대해서도 경우에 따라 지휘 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이 줄줄이 옷을 벗을 수도 있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사망사고를 적당히 덮을 수 없게 되자 실효성 있는 구타 및 가혹 행위 근절이나 자살방지 프로그램 개발 등에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고, 실제로 사망사고 발생 건수는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한겨레출판, 2014. 258-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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