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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화된 무력감

강산21 2009. 3. 2. 15:26

학습화된 무력감


미국의 여성운동가이며 심리학자인 레노어 워커는 1978-1981년 사이에 가정폭력 피해여성 435명을 면접한 후 가정폭력이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레노어 워커는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화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마틴 셀리그만은, 일정한 공간에 가둔 실험쥐들에게 일정 시간 반복적으로 전기충격을 가한 다음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전기충격을 가해도 실험쥐들은 도망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레노어 워커는 ‘반복적으로 맞는 여성들’ 또한 이 실험쥐들과 유사한 심리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매맞는 사람 증후군(Battered Person Syndrome)’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 후 피해자가 ‘매맞는 사람 증후군’을 앓아온 상태에서 가해자 남성에 폭력을 가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는 정당방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매맞는 아내의 정당방위(Battered Woman Defense)’라는 법률적 기술용어가 생겼다. 현재 여성단체들은 이의 지속적인 법적용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학대자인 남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다면 이미 수동적인 행위, 즉 학습화된 무력감의 징후가 아니므로 병리적 판단에 따른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2001년, ‘매맞는 아내의 정당방위’를 소재로 한 노효정 연출, 박신양 이미연 주연의 <인디언 썸머>라는 영화가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기존의 국내 판례에서는, 매맞는 아내가 가해자 남편을 살인했을 경우 일정한 감형사유로는 인정하되 정당방위와 같은 적ㄱ그적 무죄개념은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법원이 가해자 남편을 살해한 여성에게 처음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인정하여 징역 5년을 선고한 것을 기점으로 선처판결이 잇따르는 추세이다. 하지만 국내의 여성단체들은, 단순한 선처가 아니라 매맞는 아내의 정당방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법 적용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여성의전화 이명숙 변호사는 “국내 법원은 ‘매맞는 여성 증후군’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수적 판결이 많으며, 법원 내에 폭력전담법원을 설립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전쟁, 천재지변, 폭행, 강간 등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사람이 우울, 불안, 수면장애 등의 증상을 보이다 공황발작이나 폭발적 행동을 하는 증상을 말하며, 레노어 워커가 이론화한 ‘매맞는 사람 증후군’도 심리학적으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지식e> season1, EBS지식채널e, 2007,  170-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