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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자물쇠와 열쇠

강산21 2009. 2. 7. 17:38

자물쇠와 열쇠

- 지키려는 자와 훔치려는 자의 싸움

 

1885년 7월 6일, 광견병 백신을 발명한 프랑스 생물학자 루이스 파스퇴르는 미친개에게 물렸다는 한 소년에게 첫 주사를 놓았다. 파스퇴르는 처음에는 약한 병균을, 그 다음에는 조금 센 병균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더 센 병균을소년의 몸에 넣었다. 긴장의 나날이었다. 자칫하면 소년의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마지막 열네 대째 주사를 끝내고도 소년은 건강했다.


소년 조제프 메스테르는 파스퇴르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파스퇴르가 1895년 9월 25일 사망하자, 메스테르는 기꺼이 파스퇴르 연구소의 수위를 자청하여 날마다 파스퇴르 묘소를 참배했다. 그런데 불운한 그림자가 메스테르에게 닥쳤다.


1940년 독일군대가 침입하여, 파스퇴르의 지하묘소를 열라고 요구한 것이다. 독일군인들은 독일에적대적이었던 파스퇴르 과거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주검을 난도질하려 함이 분명하였다. 메스테르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단순히 열쇠를 주지 않는다고 물러설 독일군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메스테르는 "절대로 손댈 수 없다" 라고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나 의연한 죽음이었다. 기세등등하던 독일군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당황했고, 메스테르의 자살에 감동한 나머지 파스퇴르의 묘소를 손대지 않았다.


사실 열지 못할 자물쇠는 없다. 그러나 '자물쇠' 의 상징성은 '언제나 잠겨있음' 이다. 그러하기에 영국 작가 아서 코넌 도일은 추리소설의 탐정이름을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라고 명명하여 사건을 풀려는 의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Sherlock'은 '도자기파편'을 의미하는 'sherd'와 '자물쇠' 를 뜻하는 'lock'의 합성어로 '작은 단서로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 을 의미한다.


자물쇠와 열쇠의 역사

자물쇠는 문·서랍·금고 등 여닫게된 곳에 채워서 열쇠가 없으면 열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말한다. 열쇠는 물론 자물쇠를 여는 쇠붙이를 뜻한다. 열쇠와 자물쇠는 역사를 같이 한다. 누군가의 도둑질을 막기 위해서 자물쇠가 만들어 졌고, 그것을 여는 열쇠는 주인이 갖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쇠와 자물쇠는 동시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물쇠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보안의 개념보다는 봉인(封印)의 개념이 강했다고 여겨진다. 고대 이집트인은 정교한 목제 자물쇠와 열쇠를사용했는데, 창고 문에 달린 빗장에 나무를 깎아 만든 자물쇠를 설치한 형태였다.

로마인들은 철제 자물쇠와 청동제 열쇠를 사용했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 지중해 연안 국가에는 자물쇠가 확실히 보급되었다. 그후 이슬람 세계에서 자물쇠 공업을 주도했으며 실크로드를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다.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에는 손을 대면 손가락 끝을 베일 수 있는 날카로운 칼날 따위의 도난 방지장치를 덧붙인 자물쇠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열쇠와 자물쇠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새롭게 형성·발전되었다. 1778년 로버트배런은 자물쇠를 비틀어 열기 어렵게 하는 '날름쇠(tumbler)' 를 고안했고, 1784년 조지프 브라머는 요즘도 사용되는 원통형 열쇠가 달린 안전자물쇠를 특허냈다.


자물쇠 형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기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에 대한 언어표현도 달라졌다. 즉 우리는'자물쇠를 채운다' 라고 말하지만, 일본에서는 '열쇠를 건다' 라고 말하고, 서양에서는 '자물쇠를 한다' 라고 말한다.


자랑이 낳은 열쇠 문화

열쇠는 고대부터 권력층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제국의 왕족들은창고나 상자에 보물을 가득 넣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흐뭇해했다. 귀족들 역시 곳간에 귀중품들을 보관하고는 그 열쇠를 자랑삼아 갖고 다녔다.


서기 1000년경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바이킹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이킹은 외국인을 노예로 삼고, 침략한 땅에서 온갖 만행을 다 부렸지만 자기들끼리는 비교적 발달한 사회질서를 유지했고, 그 당시 어느 종족보다도 진보된 평등 사회를 구성하였다. 바이킹은 영주(領主)에게 세금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여자도 토지를 소유하고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으며, 이혼도 쉽게 하고 또 이혼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허리에 찬 열쇠 다발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예 '열쇠패' 를 만들어 가보로 삼았다. 열쇠패는 열쇠를 꿰어서 달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패인데, 별전이나 색실을 달아 멋을 부렸다. '개금패(開金牌)'라고도 불린 열쇠패는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여성의 혼수품으로 쓰였고 길상문구나 무늬를 장식하여 행운을 기원했다.


불신이 낳은 정조대

열쇠는 십자군 시대에 '기회' 의 상징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십자군 원정에 나섰던 중세 유럽의 남정네들과 장사 때문에 집을 떠나 오랫동안 다른 곳에 머물러야 했던 상인들은 정조대를 만들어 아내에게 채우고 떠났다. 자물쇠를마음마저 잠그는 상징물로 착각하여 생긴 우스꽝스러운 풍속이었다.


정조대는 12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3세기에는 프랑스로, 15세기 경에는 유럽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지방에서 정조대 공업이 성행했으며 더불어 열쇠업자들도 대목을 만났다. 당시의 풍속화를 보면 대문 앞에서 아내가 길 떠나는 남편에게 작별 인사는 하는 그 순간 정부가 뒷문에서 열쇠를 들고 기다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의 열쇠는 곧 '기회' 였다.

그러나 정조대에 채운 자물쇠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역증거로 활용되었다. 애욕이 불타오르는 여인들은 남편이 떠나자마자 열쇠업자를 찾아가 열쇠를 만들고 애인과 밀애를 즐겼기 때문이다. 정조대는 18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물쇠는 그저 채운 사람의 마음만 안심시켰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기·자석 등을 이용한 첨단 자물쇠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문을 잠그는 것일 뿐 완벽한 보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물쇠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주는 까닭에 여전히 나름대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세상을 바꾼 그것 100가지> 박영수, 숨비소리, 2008, 298-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