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세상읽기] 녹색 속의 핏빛 / 배병삼

강산21 2009. 2. 9. 19:58

[세상읽기] 녹색 속의 핏빛 / 배병삼

 

지금 청송의 사과나무들은 편안할 것이다. 지난해 늦가을 다녀온 청송의 골과 들은 온통 붉은 사과밭이었다. 한데 사과나무들 모습이 너무나도 기형적이었다. 어른 주먹만한 열매들을 빼곡하게 매단 나무가 너무 어리고 여렸던 탓이다. 마치 나이 어린 미혼모가 아기 여럿을 힘겹게 안고 있는 모습이랄까. 그러고 보니 가녀린 나무들 뒤에는 쇠파이프가 십자가 모양으로 서 있었다. 사과나무들은 몸은 파이프의 세로대에 기댔고 가지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두 팔처럼 가로대에 동여매져 있었다.
나무는 생명이 아니라 열매를 생산하는 기계였다. 나무에게 사과는 자식이 아니라 원수 같아 보였다. 그 많은 열매들을 먹일 영양분이 어리고 약한 나무에게 있어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과와 나무는 사과-나무로 이어진 부모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사과/나무로 대립하고 싸우고 있는 듯해서 사과는 탐욕스럽고 나무는 더욱 지쳐 보였다. 어미의 먹이를 빼앗아 먹어야 살찌는 사과와, x끼에게 먹을 것을 빼앗기고 나면 제 목숨을 해치는 나무의 사이란 사랑이 아니라 적대일 것이다.

그러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사과들이 예뻐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어미의 살과 진을 빼먹는 살모사 같았다. 제 어미를 죽여서야 제 살을 채우는 살모-사과! 생각이 이런 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자 문득 섬뜩해졌다. 사과의 빨간색은 핏빛으로 바뀌었고, 농장은 공장으로, 아니 전쟁터로 보였다. 사과는 핏빛 폭탄이었다.

생뚱맞게 생각은 또 날아서, 사람이 나무로부터 사과를 떼어낼 때 나무는 그 별리가 시원할까 섭섭할까 연상하는 데까지 닿았다. 사과는 제 어미의 가지를 떠나기가 아쉬울지 몰라도, 저 많은 열매들을 살찌우느라 여윈 나무는 섭섭하긴커녕 시원하고 홀가분할 터였다.

제 어미의 살과 진을 빼앗아 먹고 큰 사과들이 어찌 건강할 수 있으랴. 사과는 어미의 사랑을 먹고 자란 생명의 자식이 아니라 탐욕과 약탈로 배부른 폭탄 덩어리들이니, 대형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돈을 기다리는 사과들은 원래의 사과가 아니라 사과 모양을 한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일 테다.

사과들을 떠나보낸 나무에게 이 겨울은 슬픔의 계절이 아니라 도리어 겨우 맞은 안식과 평안의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될 정월대보름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이제 그 평안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또 어찌 사과나무뿐이랴. 지난가을 제값을 받지 못한다고 배들을 땅에 묻어버렸다는 소식이나, 올겨울 양배추가 넘쳐난다는 제주도 소식의 뒷그늘에도 이런 사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제철을 잃어버린 채 형광 불빛 아래 선명한 빨간색을 드러낸 딸기의 등 뒤에도, 곧 쏟아질 샛노란 참외의 뒤에도 그런 이력이 들어 있을 것이다.

나아가 조류독감이 돌면 반경 500미터, 또는 위험지역 3킬로미터 안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살처분’되고 마는 닭들의 살 속에, 제 동족의 뼛가루를 갈아 먹고 미쳐 버린 소들의 살 속에도 같은 내력이 들어 있을 것이다. 급기야 피가 나도록 긁어대는 아토피 피부병에 걸린 아이들의 살갗 속에도, 유치가 빠지고 나면 당연히 나야 할 영구치가 생기지 않는 아이들의 입속에도 같은 사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언어란 결핍과 욕망의 투사물일는지 모른다. 근래 주변에서 부쩍 자주 들리는 생태니 생명이니 자연이니 녹색이니 하는 말들 속에 실제로는 ‘비생태’와 ‘몰생명’, ‘비자연’과 ‘핏빛’의 현실이 들어 있고, 우리는 생태와 자연, 생명과 녹색이라는 말들을 암송함으로써 두려움을 삭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