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강산21 2009. 2. 6. 11:23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

 

지금 대한민국은 두 가지 죽음으로 패닉에 빠져있다. 물대포와 경찰특공대의 고공 진압에 대항하던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관 한 명 등 여섯 남자의 허망한 죽음이 그 첫번째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연쇄 살인마에 의한 일곱 여인의 죽음이 두 번째다. 두 번째 사건은 증거가 분명하고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이므로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용산의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잘못 책임지는 정치의 덕목

사과는커녕 유족의 참여도 없이 부검을 강행하는가 하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철거민에게는 엄동설한에 다시 물대포로 맞선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사람이 여섯 명이나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법질서이고 실용인가? 사람의 목숨이 개발사업의 제물이 되어도 좋단 말인가? 사람이 죽는다면 경제는 살려서 무엇에 쓰겠는가?

제발 누구라도 나와서 '잘못했습니다', 한 마디만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정부도 살고 철거민과 유족의 애타는 가슴도 진정되고 들끓는 민심도 잠재울 수 있다. 그래야 더 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사건 뒤에 있었던 '대통령과의 원탁 대화'를 보니 이런 바람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할 뜻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을 떼쟁이로 묘사한 용산구청의 펼침막이 정확히 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망루에 올라가지도 화염병을 만들지도 않았다면 진압도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희생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떼쟁이로 몰지만 않았어도 망루에 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었다면 이런 끔찍한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醫國)은 흔히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醫人)에 비유되곤 한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병을 고치다 보면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책임을 피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의사와 정치가의 덕목이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성산 장기려 박사는 수술 중의 사고로 온 몸이 마비된 환자에게 솔직히 실수를 털어놓고 평생 월급을 쪼개 그를 돌보면서 살았다. 환자도 그런 박사를 원망하지 않고 지극히 존경했다고 한다.

반대로 어떻게라도 책임을 회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마련이고, 그러기 위해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다 보면 그걸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우까지 생긴다. 이렇게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심리학 연구에서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자기보호의 본능은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희생자들이 자신의 차에 타지 않았으면 살해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연쇄살인범의 궤변도 자기보호를 위한 기만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피해자 가족들은 이 말에 더욱 치를 떨었지만 본인에게는 무척 절실한 기만책이었을 것이다.

환자의 얼굴 대신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는 의사, 어려운 전문용어로 환자의 질문을 가로막는 의사, 환자의 불만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의사는 환자와 공명을 이루지 못하며 작은 실수로도 의료과오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당연한 얘기다.

국민과 소통 외면하는 자폐증

두 번이나 사과를 했으면서도 오히려 그 사과를 받은 시민을 잡아들이는 정부, 인터넷에서 경제 예측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나라, 진압 과정에서 여섯이나 되는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에서 국민과 정부의 소통은 공염불이다. 소통이 안 되니 잘못된 믿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것을 진실로 여기는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모른다. 사람으로 치면 영락없는 자폐증이다. 정말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