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세상읽기] 용산 참사-울혈사회 한국의 축도 / 박명림

강산21 2009. 2. 2. 13:40

[세상읽기] 용산 참사-울혈사회 한국의 축도 / 박명림
세상읽기
한겨레
»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용산 참사는 오늘의 한국을 관통하는 축도이다. 이성과 법치를 말하는 오늘의 이 야만은 우리 사회에 편재하는 ‘사회적 울혈’의 한 폭발이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재앙으로도 우리 사회의 울혈이 지도자와 정부의 반성을 통해 치료되지 않는다면 용산에서 터진 울혈은 정맥을 넘어 심장을, 끝내는 사회 전체의 흥망과 생존을 좌우할지 모른다. 용산 참사는 ‘울혈사회’ 한국에 던지는 무서운 경고인 것이다.

 

참사의 기저 원인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다. 캐나다를 5번이나 살 수 있고, 소득 대비 주택가격이 세계 최고인 부동산천국에서, 서울 땅값은 1176배가 오르는 동안 실질소득은 고작 15배 늘었고, 봉급으로 강남에 집을 사려면 44년이 걸리며, 무려 68만가구·162만명은 판잣집·옥탑방·쪽방·움막 등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동산 지니계수는 0.9를 넘어 세계 초유의 완전불평등 상태이며, 세계 최고의 부동산 경쟁력은 국가자원분배·산업배치·교육경쟁력을 심대히 해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세계 최고 불평등 상태에서 정부 역할의 왜곡과 법치의 실종이다. 이 원인은 첫 번째 것보다 더 크다. 법치 논리를 따를 때 정부의 탈출구는 사라진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통찰처럼 재산과 불평등 문제처럼 공공 법치가 필요한 것은 없다.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킬 ‘재개발사업’을 둘러싸고 건설업자-조합-주민-세입자가 이익과 생존의 문제로 다툴 동안, 한편이 강제철거와 용역폭력을 수행할 때 정부와 행정기관은 엄정한 법치국가와 중재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법치의 최소 근거는 생명 및 재산다툼에서의 중립성·공공성에서 출발한다. 둘째, 폭력의 문제다. 폭력에 관한 한 참된 법치정부라면 건설업자와 철거민 사이의 균형을 넘어, 국가행동의 법적 준칙 자체를 준수해야 한다. 우리가 직접 정부를 선출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의·생명·자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한 가치를 위해서는, 오바마의 말처럼 진보적 조국도 보수적 조국도 있어서는 안 된다. 철거민의 망루집결 이후라도 민주정부로서 타협과 설득 노력을 했는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생명·자유·질서 보호를 위한 ‘폭력 허용’의 최소 요건인 “현존하는 즉각적인 위험”이 아닌데도, 즉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인명피해를 방지하겠다며 선제적 다수인명피해를 양산한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법치파괴이다.

 

정치는 사람이 한다. 곧 용산 참사와 인사 문제의 관계이다. 이번 사태의 직접 원인은 대통령의 인사다. 최고 치안 책임자가 촛불 강경진압을 잘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6개월에’ 한 번씩 초고속 승진할 때, 임명 이후 더욱 강경진압을 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게다가 사건은 국가정보·국무조정·통일·교육·국가경쟁력·미래기획 등 국정의 핵심 부문에 친위세력, 강경파, 경질인사들을 전보·임명·복귀시키는 시점에 일어났다. 용산 참사가 국가 통치와 정부 정책의 구체적 표현인 인사와 맞물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정치의 최소 기본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예의이다. 사망한 경찰과 철거민은 모두 잘못된 정치의 공동 피해자들이다. 용산 참사로 6명의 국민 생명을 앗아간 책임계선을 구속·처벌하지 않고, 외려 이념문제로 몰아가, 경찰과 철거민을 갈라놓은 뒤 책임을 후자에게 돌리고, 나아가 국민을 진보 국민과 보수 국민, 친경찰과 친철거민으로 갈라놓는 언론과 정부를 보며 ‘용산 참사 이후’가 더욱 두려운 것은 그것이 국민과 조국에 대한 최소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퇴계에게 보낸 율곡의 편지가 두렵게 다가온 적이 없다. “만약 경장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곧 나라 꼴이 아닐 것입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