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삶의창] ‘녹색’은 ‘성장’과 공존할 수 없다 / 김종철

강산21 2009. 2. 10. 14:46

[삶의창] ‘녹색’은 ‘성장’과 공존할 수 없다 / 김종철
삶의창
한겨레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외신에 따르면, 요즘 오스트레일리아는 엄청난 고온 현상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섭씨 45도를 넘는 날이 계속됨으로써 더위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여름 날씨라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평상시 기온이 이렇게 살인적인 수준까지는 오르지 않는다. 메마른 대륙 내부의 사막지대 얘기가 아니라, 쾌적한 남부 해안지대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러 해 연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주요 도시에는 먹는 물도 배급제를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판단하고 있다.

 

제아무리 선진문명이라고 해도, 기후변화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기후변화가 이제 국지적인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밀어닥치고 있다는 점이다. 남태평양의 산호초 섬 투발루가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하자 그곳 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호의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 이주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만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거주 불능 지역이 된다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마 그때는 오스트레일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환경 난민이 들끓고, 온 세계는 묵시록적 풍경을 드러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이 예고된 재앙에 대해서 문명사회는 경악할 만큼 굼뜨고 어리석은 반응으로 일관해 왔다. 오랫동안 세계의 권력 엘리트들은 산업경제의 확대와 지구온난화 사이의 연관관계를 부인해 왔고, 설령 어떤 연관관계가 있다고 해도 ‘경제’를 희생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고집해 왔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였다. 부시는 기후변화에 대처하려는 인류 공동의 노력을 끊임없이 좌절시켰다. 부시의 재임기간 8년은 어쩌면 결정적인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던 8년 전만 해도, 과학자들은 아직 기후변화의 회피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변화의 불가피성이 기정사실화되었다. 다만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보자는 게 현재 이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나리오가 된 것이다.

 

부시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이 오바마에 의해 벌충될 수 있을까? 오바마 정부의 화급한 현안이 ‘경제위기’의 극복에 있는 한, 전망은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지금 오바마 정부가 말하고 있는 ‘녹색뉴딜’은 환경도 고려하고, 경제도 살리겠다는 의도로 구상된 것이겠지만, 이것이 과연 기후변화라는 가공할 재앙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될지 심히 의심스럽다.

 

문제를 풀자면, 문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지금 현안이 되어 있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위기는 결국 산업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것이고, 이 산업경제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란 가차 없는 경쟁, 이윤추구를 위한 전력질주의 체제다. 이 체제에 자기절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유한한 자원과 에너지의 무한 소비를 강제하는 이 체제로 생물권이 파괴·오염되고, 공동체가 파괴되며, 인권이 유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장기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토대인 생태계와 자본주의 체제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금 세계적인 경기후퇴는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 잠시나마 정체한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다. 세계가 자본의 논리를 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뉴딜’이니 ‘녹색성장’이니 하는 것은 결국 말장난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래의 성장논리에서 조금도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녹색’이란 ‘성장’과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