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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교장선생님, 역사교과서를 바꿔선 안 됩니다 / 김승배

강산21 2008. 12. 11. 10:25

[왜냐면] 교장선생님, 역사교과서를 바꿔선 안 됩니다 / 김승배
왜냐면
한겨레
교육청에 다녀오신 뒤 금성 교과서를 바꾸려 하십니다
예산에 불이익 있다고 딱 한번 눈감자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특정 교과서가 아니라 역사교육입니다

 

존경하는 교장선생님께

날씨도 춥고 시대의 공기도 차갑습니다. 권력이 역사를 이긴 ‘순간’은 많았지만 권력에 패배한 ‘역사’는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또다시 권력이 역사를 이기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 사냥’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이하 금성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하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훼손하고 있다며 일부 내용의 수정을 지시하고, 교과서 주문 기한을 연장하는 등의 편법을 동원하면서까지 금성 교과서 교체를 사실상 강요하고 있습니다. 경기도교육청도 교장선생님들을 불러모아 학교 예산 지원상의 불이익 운운하며 금성 교과서 교체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그러나 우리는 바꿀 수 없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5년을 임기로 하는 집권 정당이 교체되었다고 해서 역사 교과서가 바뀔 수는 없습니다.

 

금성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면 다른 교과서도 모두 ‘좌편향’입니다. 모든 근현대사 교과서는 김영삼 정부 때 제정한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 기준을 통과한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면 김영삼 정부의 교육과정 또한 ‘좌편향’ 아닌가요?

 

역사 교과서의 선택은 역사교사에게 맡겨야 합니다. 역사교사들이 교과서에 대한 개별 평가 점수표를 작성하면 학교운영위원회와 교장선생님은 평가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여 교과서를 결정하는 절차와 관행을 지금까지 잘 지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20여일간 수차례 협의에서 역사교사 모두 재선정 절차를 진행할 수 없음을 밝혔고, 이에 교장선생님도 결국 동의하셨으며, 같은 내용의 교과협의록 결재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교과서 주문 기한이 연장되고 교육청에 다녀오신 후 절차를 뛰어넘어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 교과서 교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역사교사들이 교과서 교체의 이유가 없다며 점수표를 작성하지도 않았는데 학교운영위원회에 교체 안건을 상정하여 교과서를 바꾸려 하십니다. 이는 지켜야 할 절차와 그동안의 관행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교육청은 무섭고 역사교사는 우스운 존재입니까?


교장선생님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며 설득하십니다. 그러나 멀쩡한 교과서를 ‘좌편향’이라며 부정적으로 보고 교체를 강행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만 고집 피우고 자존심을 좀 죽이라 타이르십니다. 전국의 역사교사와 역사학자들 그리고 시민들이 반대하는데도 바꾸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출판사가 자체 수정을 한다는데도 교과서 교체를 몰아세우며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이 출판사나 저 출판사나 애들 가르치는 데는 차이가 없지 않으냐고 하십니다. 차이가 없는데 왜 굳이 바꾸시려 하십니까?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특정 출판사의 교과서가 아니라 역사교육입니다.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눈 한 번 딱 감고 넘어가자고 회유하십니다. 이번에 눈감으면 다음에는 귀를 막고 그 다음에는 입을 닫으라고 하시겠죠. 예산에 불이익이 있다고요? 돈을 위해 원칙을 버리라고 몸소 보여주는 것이 교육입니까?

 

제발 교장선생님을 계속 존경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난 20일 동안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지친 역사교사를 이제 그만 놓아 주십시오.

 

김승배 경기 광명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