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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명천지에 분서갱유(焚書坑儒)라니!

강산21 2008. 12. 4. 15:04

 

21세기 대명천지에 분서갱유(焚書坑儒)라니!

- 역사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



21세기 대한민국에 분서갱유의 악령이 떠돌고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분서갱유’ 사건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업적에도 폭군으로 불리게 된 그 역사적 사실이다. 이로 인해 춘추전국시대에 화려하게 꽃피웠던 제자백가 사상은 상당기간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2,200년이 지난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와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모범국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찾겠다며 집권한 세력이 시계를 기원전으로 돌린 것이다.


진시황릉에 같이 묻힌 ‘분서갱유’의 악령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한복판에 버젓이 부활했다. 누가 이 ‘분서갱유’의 악령을 불러 왔는가?


권력에 의한 역사교과서 수정 시도는 사실상의 ‘분서’행위


진시황이 법가라는 단일한 통치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학문과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 ‘책을 불태웠다(焚書)’면, 이명박 정부는 획일적 보수이념에 사로잡혀 ‘사실상의 분서 행위’를 권력의 힘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미 1997년 최초의 정권교체 이후 이념논쟁의 차원에서 보수언론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교과서에 대한 좌편향 시비는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그 후 2005년 1월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 교과서가 좌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교과서 포럼』을 만들며 이들의 행동은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세세한 평가는 하지 않겠다. 그들의 수정요구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학계에서 조목조목 비판했기 때문이다.(친일역사관, 박정희 독재정권의 미화 등등 그릇된 역사관) 그들의 주장을 동의하지 않지만 인정은 하겠다. 자기의 철학과 가치관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교과서 포럼』은 물론, 그 누구도 역사에 대해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고, 또 논쟁을 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제기와 논쟁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자 권력의 힘을 동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논쟁을 권력의 힘으로, 문제제기를 강압에 의해서 관철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라 할 수 없다.




보수진영은 야당과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있을 때 주로 장외에서 주장하던 것을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는 이제 권력의 힘으로 밀어부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시민단체, 경제계, 시·도 교육청, 교과부 등 행정기관, 한나라당, 언론 등 보수적 동맹체가 역사교과서에 대한 ‘사실상의 분서 행위’에 총동원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집필진의 저작권 훼손은 ‘갱유(坑儒)’ 행위


자신들의 획일적 이념을 강제하기 위해서 교과서 집필진들의 저작권을 훼손하는 것은 ‘선비들을 묻어 버리는 갱유(坑儒)’에 다름 아니다. 일반적으로 저작자의 창작물은 자기의 생명과 같은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서 법은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두고 있고, 이는 더욱더 강화되는 추세이다.


이런 추세와는 관계없이 현재 진행되는 상황은 저작자의 권리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권력이 강압적으로 수정을 지시하고, 출판사는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집필진의 동의 없이 수정을 강행한다. 기업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출판사는 더 이상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갱유(坑儒)행위’의 공범으로 몰리고 말았다.


비단 교과서 문제만이 아니다. 앞으로 저작자의 동의와는 관계없이 출판사, 방송국 등에서 임의로 저작물을 수정하는 ‘일상적 갱유(坑儒) 사회’로 우리 사회가 접어든 것인가?


대통령의 출판사에 대한 압박은 反기업적 행위


뉴라이트단체, 교육과학기술부, 각 시·도 교육청이 전방위로 나서더니 이제 이명박 대통령이 전면에 나섰다.


대통령도 자기의 역사관과 철학을 갖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보수든 진보든... 그러나, 대통령의 입에서 이런 발언이 나온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견해를 뛰어넘는 중요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도대체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기에 전교조만 두렵고, 정부나 다른 단체들은 두렵지 않다는 것이냐”(11.26 역사교과서 수정을 거부한 출판사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 한겨레 12.1 보도)


사실상 대통령이 출판사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회사가 망할 수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낄만한 발언이다. 도대체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이야기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입에 달고 사는 대통령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反기업적 발언이다.


“교과서의 수정이 집필진의 학문적 양심에 비추면 수용할 수 없지만”, “4,500명의 임직원의 고통과 회사의 어려움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결단을 내린 것”(11.30, 금성출판사 대표이사의 한겨레신문 인터뷰 내용 중)


실제 출판사는 위협을 느끼고 있다. 4,500명 임직원의 생사를 두고 권력에 맞설 기업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발언과 기업이 받은 위압감을 두고 단순하게 ‘오해가 있다.’고 넘길 문제는 아니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면서까지 역사교과서의 수정을 강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논쟁을 넘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권력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기업은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 생각이 기업과 시장을 지배한다면 창의적 경제활동은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역사가 바뀔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왕은 자기의 재임 기간 중 사관에 의해서 쓰여진 사초를 볼 수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있던 조선의 왕도 자기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는 개입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역사를 객관적 사실기록으로 만들고자 했던 조선시대의 역사관이었다. 이 객관성이야말로『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게 했던 힘이었다.


연산군은 이 금기를 깨어서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켰고, 조선 500년 최악의 폭군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史禍)도 사초 전체에 대한 열람과 수정이 아니라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일부 사초만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을 선출한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가 수정된다면 그 역사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바뀐다고 역사가 바뀐다면 그건 역사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수정되었다면 전세계인이 인정하는 기록유산이 되었겠는가? 조선의 왕이 역사 위에 있지 않았듯이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역사 위에 존재할 수 없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학교 교육을 죽일 생각인가?


현행 ‘고등학교『근·현대사』교과서’의 검인정화는 김영삼 정부에 의해 진행된 7차 교육과정 개편에 의해 채택된 제도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역사교과서의 국정제도를 극복하고 세계 대부분의 민주주의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검인정 제도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역사학계는 이에 대해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중요한 전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다양성과 창의성을 생명으로 하는 검인정제도에서 획일과 독선의 국정교과서로 돌아가는 역사적 후퇴가 진행되고 있다. 검인정 제도는 논쟁과 토론, 합의에 따라 수시개정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에서 얼마나 채택되느냐에 따라 검증되고 있다.


교과서 검인정제도는 국민적 합의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학계와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며, 다양한 견해의 교과서에 대한 교사와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교과서 수정 시도는 검인정제도를 사실상 부정하고 국정화하려는 행위이며, 역사교육의 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이고 독선적인 교육풍토를 확산시켜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을 죽이고 말 것이다.


역사교과서 수정요구는 이념을 앞세운 정치공세에 불과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걸 누가 부정하는가?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았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검인정교과서에는 서술지침이 있다. 이 지침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북한의 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통일지향적,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의 참혹상을 알고 평화통일 당면과제임을 인식 한다”로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위의 헌법 전문과 비교해 보면 이 서술지침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현재의 검인정교과서는 이러한 서술 지침을 준수했고, 그 결과 승인된 것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했다면 현장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부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들어 역사교과서의 좌편향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권력의 힘으로 수정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적·교육적 논쟁을 넘어선 정치공세이다.


자율과 경쟁을 말하던 당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정부는 몇 차례에 걸친 수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집필진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집필진들을 제외한 채로 정부와 출판사가 일방적으로 수정을 강행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학교자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 왔다. 임기 초에 문제가 되었던 0교시, 보충수업 자율화를 중심으로 한 “학교자율화 방안”, 입시 선발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권을 대폭 보장한다는 “대학자율화 방안” 등이 그것이다. 각종 교육규제에 대한 해체를 주장한다. 그 결과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가중되고 사교육비 부담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함에도 앵무새 같이 자율을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문제에 한해서만 보면 학계와 교육계의 자율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도교육청은 교장을 동원해 역사교과서의 수정필요에 대해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진행하고, 그 교장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교사와 학부모를 압박한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관제 동원식 정책집행이다.


자유로운 경쟁을 주장하던 그 논리에 맞는 방법은 권력의 힘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다양한 교과서를 출판하게 하고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선택하게 하면 된다. 뉴라이트 계열의 그 역사 해석이 타당하다면 당당하게 교과서를 출간하고 수요자의 선택을 기다리면 될 문제이다.


역사는 권력 위에 있다.


권력에 의한 역사교과서의 강압적 수정에 대해서 전국의 역사교수, 역사교사, 교과서의 집필진은 물론, 학생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이 반발은 좌편향된 잘못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반발이 아니다. 일부 전교조 교사들의 주장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논쟁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정리하면 될 문제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국민의 반발이 거센 것은 자유로운 토론과 선택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말살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권은 유한하다. 정권은 역사에서 자기의 할 일을 묵묵하게 하면 된다. 그 정권이 해야 할 일에 권력의 힘을 동원한 역사의 수정은 없다. 역사는 권력 위에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연산군은 역사를 묻어버리려 했지만 결국, 그 역사에 자신들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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