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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수용이냐 투쟁이냐

강산21 2008. 11. 11. 12:37

펌원문)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93 

 

                 교원평가, 수용이냐 투쟁이냐

 

                                                                 

                                                              이 기 정   현)창동고 교사

 

 교원평가와 s교원평가    


 용어 정리부터 해야겠다. 교원평가라는 말은 참으로 지랄 같은 말이다. 교사에 대한 평가제도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원평가’라는 말을 교사 평가제도 전체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교육부가 ‘교원평가’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일반 사람들은 교사들이 그동안 그 어떠한 평가도 받지 않아왔던 속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교원평가 반대를 외치는 전교조에 대해 국민들이 갖는 부정적 생각의 일부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의 교원평가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다만 그것을 교원평가라 부르지 않고 근무평정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교원평가는 존재했던 것이다.

               

이미 존재하던 근무평정에 덧붙여 교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제도가 몇 년 전부터 도입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바로 ‘교원평가’이다. 따라서 교원평가라는 이름의 새로운 평가제도가 도입되면 교원평가는 두 개가 되는 셈이다. 근무평정과 교원평가이다. 간결하게 표현하면 “교원평가 = 근무평정 + 교원평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교원평가 = 근무평정”이었던 것이 “교원평가 = 근무평정 +교원평가”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에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다면평가’라는 것이 있다. ‘다면평가’는 기존의 근무평정에 새롭게 추가되는 것으로 교사들 간의 상호 평가를 말한다. 이전에는 “근무평정 = 교장에 의한 평가”였으나 앞으로는 “근무평정 = 교장에 의한 평가 + 교사들 간의 상호 평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 정부부터 추진된 새로운 교사평가 평가가 전부 시행되면 교사에 대한 평가체계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교원평가 = 근무평정(교장에 의한 평가 + 다면 평가) + 교원평가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두 개의 교원평가를 구별할 수가 없다. 일반 국민들은 새롭게 도입되려하는 교원평가를 전체적 의미의 교원평가와 헷갈리게 된다. 설명하는 사람도 이 때문에 설명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참으로 곤란한 용어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교육 관료들이 파놓은 교묘한 함정 말이다. 무슨 함정인가? 이것은 뒤에서 다시 얘기한다. 아무튼 그래서 일반적 의미의 교원평가와 새로 도입되는 교원평가를 구별하기 위해 새로 도입되는 교원평가를 앞에 s를 붙여 ‘s교원평가’라 부르겠다. 작은(small) 의미의 교원평가라는 얘기다.

  

교원평가 = 근무평정(교장에 의한 평가 + 다면 평가) + s교원평가

 


왜 수용해야 하는가?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가 기존의 근무평정(교장에 의한 교사평가)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폐해가 있어도 기존의 근무평정보다는 덜 할 것이요,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기존의 근무평정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교장이 아니라면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를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는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가 신자유주의의 소산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 제도가 신자유주의적인 제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 제도를 도입하려는 정부와 교육부의 관료들이 신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 제도가 신자유주의 제도냐 아니냐를 가리는 것은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고 아니라고 말하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로선 증명이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물론 어쩌면 정부와 교육부의 관료들 중에는 신자유주의자도 적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 제도는 신자유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가 어떤 것을 부정하거나 반대할 때는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지 무조건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관계있기 때문은 아니다. 세상에는 신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신자유주의보다 더 나쁜 것도 있는 법이다.

              

전교조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신자유주의를 전교조의 주적으로 삼은 듯하다. 그렇다면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투쟁한답시고 감옥에까지 갔다 왔으며,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탄생을 진심으로 반겼던 나는 도리 없이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자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신자유주의적인 김대중․노무현 정권보다 전두환․노태우의 군사 정권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대해 나는 조금도 양심상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보다 더 나쁜 것이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전교조의 주장대로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가 신자유주의적인 제도라고 하자. 그러나 근무평정제도는 신자유주의적 제도인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보다 더 나쁜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자인가? 아니다. 한때는 사회주의자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인가? 잘 모르겠다. 내가 사회주의자로 자처할 때는 사회민주주의를 기회주의로 비판했으니 아니었고, 지금은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를 꽤 신봉하고는 있으나 사회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선다. 어쩌면 나는 생각은 사회민주주의보다는 리버럴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사회주의주의자는 아닐지라도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에 대한 미련과 애정이 강한 것은 맹세컨대 사실이다. 만약 ‘다면평가’나 ‘s교원평가’가 사회민주주의적인 제도를 밀어내거나 약화시키면서 도입되는 것이라면 나는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제도를 밀어내면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시대부터 군사정권시절에 이르기까지 교사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만 작용했던 근무평정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설사 혹자의 주장대로 새로 도입되는 평가제도가 신자유주의적인 제도라 할지라고 근무평정제도가 그것들보다 나은 점이 조금이라도 더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존의 근무평정제도가 학교 교육을 얼마나 심하게 망쳐왔는지는 명확하다. 기존의 근무평정제도를 그대로 두고서 학교 교육을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이건 아니건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생각한다면 지금의 근무평정제도는 절대로 그냥 둘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근무평정제도의 모순은 오히려 전교조 교사들이 더 뼈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교장이 평가하는 근무평정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던 전교조 교사들이 얼마나 될까? 그 수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전교조는 ‘근무평정제도’를 내버려두고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에 대해서만 강하게 반대하는가? 전교조는 ‘근무평정제도’를 반대하는 집회를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연가투쟁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흔한 조퇴투쟁이라도 한 번 해 본적이 있는가? 그런 전교조가 ‘s교원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투쟁해왔고, 왜 또 투쟁하려 하는가?

            

물론 여러 개의 평가를 받는 것은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다. 귀찮고 괴로운 면에서 보자면 물론 가급적 적은 숫자의 평가만을 받고 싶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가능하다면 어떠한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평가제도만을 남겨두어야 한다면 그것은 ‘다면평가’나 s교원평가가 되어야지 기존의 근무평정제도이어서는 안된다. ‘다면평가’나 s교원평가의 부작용은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지만 근무평정제도의 교육에 대한 부작용은 이미 철저히 검증된 것이다.

              

이미 검증된 악이지만 경험을 통해 익숙해진 악이기에 고통이 적을 수는 있다. 이제 전교조 교사들도 꽤 나이를 먹었으니 근무평정제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전교조가 근무평정제도에는 관대하고 ‘다면평가’나 s교원평가에는 적대적인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자랑스럽지는 못한 정신 상태이다. 그것은 전교조 정신의 퇴락이다.

 


 

왜 수용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이 갖는 상대적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를 왜 수용해서는 안 되는가?


나의 관점에서 전교조가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를 수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가 지금의 학교 현실에서는 근무평정제도가 갖는 부정적인 측면을 감소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다면평가’는 그렇게 될 확률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교장에 의한 평가70%(교감에 의한 평가는 교장에 의한 평가에 종속시켰다)에 비해 다면평가 30%는 너무 적다. 게다가 교사 상호간의 평가는 말 그대로 ‘다면평가’라서 평가 주체가 너무 많기 때문에 실질적인 점수 차이는 매우 적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실질적인 평가 비율로 따지면 다면평가는 교장에 의한 평가의 10%에도 훨씬 못 미칠 것이다. 실제적인 효력이란 측면에서 ‘다면평가’는 유명무실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면평가’에는 교사들 상호간의 평가라는 명분과 당위성이 있는데, 이것이 근무평정(교장에 의한 평가)의 위상을 높이는 쪽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기존의 근무평정제도가 갖는 부정성은 교사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교육부 관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근무평정제도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어떤 교사가 근무평정제도의 권위에 진정으로 굴복하겠는가? 그러나 다면평가제도에 의해 근무평정제도는 생명을 이어갈 명분을 수혈 받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면평가’ 제도가 그것을 도입한 정부의 취지와는 다르게 근무평정제도에 숨을 불어 넣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교육 관료들의 진정한 의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s교원평가도 마찬가지이다.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평가라는 명분이 교육부의 교사평가제도 전체에 힘을 실어주게 되면, 결국 그것은 기존 근무평정의 명분과 위상 강화로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다면 전교조가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를 그냥 무작정 수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한편으로는 수용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수용해서는 안 되는 딜레마 속에서 전교조는 도대체 무엇을 어찌했어야 하는가?

     


해답은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라면 분명한 해답이 있었다. s교원평가를 이용하여 근무평정과 교원승진제도의 대폭적인 개혁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그것이었다. 즉 s교원평가의 원칙적 수용을 전제로 근무평정과 교원승진제도의 대대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전교조는 정부가 내세운 s교원평가의 문제의식과 명분을 더 끝까지 밀어붙여 학생에 의한 수업(교육)평가를 전교조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교육을 저버리고도 얼마든지 높은 점수를 받고 승진도 하는 근무평정과 교원승진제도의 완전 폐지를 요구했어야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라면 이것은 충분히 시도할 만한 일이었다. 국민들도 근무평정과 교원승진제도의 실상을 안다면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전교조는 근무평정과 승진제도의 문제점에는 거의 침묵을 지킨 채 s교원평가만을 반대하여 국민들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었다.

            

국민들은 근무평정의 존재 따위는 알 수가 없었다. 교사들의 승진이 교육능력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교원평가제도라는 말 때문에 국민들은 교사들이 아무런 평가도 받지 않는 집단인 줄만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교조가 s교원평가를 반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졸지에 전교조는 수구집단으로 전락하고 교육 관료들이 개혁적인 집단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버렸다. 전교조는 교육 관료들이 처 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 든 것이었다.

            

이런 어리석음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이제 전교조에게는 아무런 해답이 없다. 그냥 가만히 패배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비꼬아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진짜로 조용히 패배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선의 해답은 이명박 정부에게 그냥 곱게 져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교원평가를 국회에서 정식으로 법제화할 때 저항하지 말고 그냥 곱게 져주는 것이다. 괜히 저항하면 이명박 정부만 국민들에게 개혁적으로 비쳐지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될 뿐이다. 괜히 저항하면 전교조만 맹목적 이익 집단으로 매도될 뿐이다.

           

이명박 정부 안에 책사가 있다면 일부러 전교조의 반대투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일부러 교원평가의 내용을 강화하고 전교조의 자존심을 긁어서 전교조의 반대투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교원평가가 쟁점이 되면 될수록 이명박 정부의 지지는 올라가고 전교조의 위상은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교원평가에 관한한 이명박 정부는 꽃놀이패를 잡고 있는 것이다. 전교조가 치열하게 싸워주면 줄수록 이명박 정부로서는 고마울 뿐인 것이다. 잘하면 소고기 광우병 파동으로 추락한 지지율의 반의 반 정도는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책사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교원평가와 전교조의 어리석음을 교활하게 이용할 책사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설사 책사가 있더라고 전교조가 그 덫에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그동안 추진되어온 s교원평가는 별것도 아닌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만족도 평가에 불과한 것이다. 전교조가 이에 말려들어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하게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s교원평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교육 관료들이 꾸며낸 거대한 사기극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 사기극을 의도적으로 꾸며냈다는 것은 아니다. 결과가 결국은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지금의 학교 상황에서 s교원평가는 어쩌면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근무평정에 정당성만을 부여해줄지 모른다. s교원평가가 근무평정을 무력화하고 교사평가제도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근무평정일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s교원평가가 시행되어 봤자 학교제도에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s교원평가가 시행되어도 학교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비극적인 얘기이다. 그러나 s교원평가를 대단히 두려워하는 전교조는 오히려 이러한 이유로 s교원평가가 시행되는 것을 얼마든지 조용히 지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지켜보는 것, 지금으로선 이것만이 전교조가 취할 최선의 방책이다.

         


전교조 교사들을 위한 변명


전교조 교사(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s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전교조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생각해보라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학생들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 더 불편 하겠는가, 아니면 나이가 지긋한 교장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 더 불편하겠는가. 보통의 교사라면 교장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 조금은 덜 불편할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감정이다.

           

이제 전교조 교사들도 나이가 꽤 많은 편이다. 비합법 시기보다 평균 연령이 10년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학생들과의 나이 차이는 더 커졌고 학생들과의 공감대는 더 엷어졌다. 나의 변해가는 감정을 살펴보건 데 전교조 교사들이 교장의 평가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학생이 하는 평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경향성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특별히 탓할 일도 아니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게다가 교장의 평가는 대개의 경우 기껏해야 사무행정업무로 결정되기 때문에 교장에게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 특별히 자존심의 상처를 줄 이유는 없다. 사무행정업무는 교사가 해야 할 본연의 업무가 아니다. 본질적 측면에서 말하면 그야 말로 그것은 잡무에 불과할 뿐이다. 잡무 평가에서 나쁜 점수를 받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냥 그저 그런 일일 뿐이다. 여기에 교장의 평가가 교장에 대한 아부와 순종으로 결정되는 면이 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교장의 평가에서 나쁜 점수를 받는 것은 더더욱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오히려 훈장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사실 전교조 교사들이 교장이 하는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최근에는 그 정도가 많이 약화되었겠으나 비합법 시기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이 하는 평가는 교육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는데, 교육은 교사가 해야 할 본연의 업무이므로 여기서 나쁜 점수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근무평정보다 더 큰 자존심의 상처를 줄 수 있는 s교원평가를 전교조 교사라고 덥석 받아들이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근무평정보다 다면평가와 s교원평가에 더 큰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 전교조라는 조직이 조합원들의 그러한 감정을 그대로 추종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전교조가 노동조합으로서 조합원의 이해와 감정을 충실히 반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교조가 대변하고자 하는 조합원들의 이해와 감정이 교총 회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전교조가 따로 존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교총은 현행의 교장승진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교장선출보직제는 물론이고 ‘교장공모제’마저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현행의 교장승진제도의 토대가 되는 근무평정제도의 유지를 강하게 원하고 있다. 그들이 립서비스 차원에서 뭐라고 말하건 이것이 그들의 실제 마음이다. 그런 그들조차도 다면평가나 s교원평가의 폐지를 위해 투쟁을 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명분이 없기 때문일 것이고 한편으로는 해봤자 되지도 않을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전교조가 대신 싸워주기 때문에 굳이 그들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인 이상 전교조 교사도 변하고 전교조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조합원들도 나이가 들었고 그들의 마음도 적잖게 변했으니 전교조도 이에 맞추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전교조라고 꼭 학생과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길을 걸어 가야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소시민적 감정에만 충실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전교조는 참교육의 이념을 투쟁의 명분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아이가 해 맑게 미소 짓고 있는 표정이 인상적인 전교조의 상징 마크를 버려야 한다. 어쩌면 전교조는 선택에 직면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양심적 교사로서 가졌던 감성과 요구를 대변할 것인가? 아니면 직업인으로서 갖게 되는 감성과 요구를 대변할 것인가? 물론 이 두개는 칼로 무 자르듯 분명히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두 개의 감성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전교조 교사의 마음속에도 이 둘은 공존하고 있다. 다만 과거에는 전자의 것이 후자의 것보다 더 강했었다. 대부분의 전교조 교사가 그랬다. 그래서 전교조 교사들은 존경받을 수 있었다. 그 도덕적 우월성이 전교조의 힘이었다. 그러나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조합원들의 마음속에서는 양심적 교사로서 가졌던 감성은 줄고 직업인으로서 갖게 되는 감성은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훌륭한 인간의 감성을 갖고 있다가 그냥 평범한 인간의 감성을 갖게 된 것 뿐인 것이다.

                      

전교조가 조합원의 어떤 감성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을 것인가는 이제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혹독했던 군사정권 시대에는 그것은 선악의 문제일 수 있었다. 그 때는 선과 악이 분명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전교조의 선택은 선악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어느 쪽을 선택해도 괜찮은 것이다. 다만 선택한 길을 분명히 밝혀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전교조가 조합원들이 직업인으로서 갖는 감성을 대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바람직한 교사로서 갖고자하는 감성을 대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행동으로는 직업인으로서 갖는 감성을 대변하면서 말로는 참교육 위한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 아무리 선과 악이 뚜렷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위선은 아직도 사람들이 경계하고 싫어하는 악이기 때문이다. 말과 실천이 일치하기만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큰 문제는 없는 것이지만, 말과 실천의 불일치만은 안 되는 것이다.

    

전교조의 주장과 행동에서 위선과 거짓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전교조가 이익 집단이라는 비난은 받아도 위선적인 집단이라는 비난만은 절대로 받지 않기길 바란다. 이것은 전교조 안에서 교사로서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한 조합원이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