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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신분제 철폐 - 수천 년 동안의 사슬

강산21 2008. 10. 7. 11:43

1894년 신분제 철폐 - 수천 년 동안의 사슬


'갑오경장'의 평가는 엇갈린다. 국가기구, 신분제, 문화관습 등 여러 부문에서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이룬 개혁으로 높이 평가되는가 하면, 동학혁명을 총칼로 무너뜨린 일본과 일본의 추종자들이 조선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기 위해 추진한 것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근대화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였다"(최진옥)

"일본적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 서구문화의 아류인 일본문화권에 예속되는 계기가 되었다"(허동현)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 부문에 있어서는 갑오경장을 통해 획기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대다수 사람들을 짓눌러왔던 신분제도의 철폐였다.


"대저 국가를 도모하는 도리는 용인用人이 첫째이니, 사색편당의 논論을 일체 타파하고, 문벌과 지역을 불문하여 오직 어질고 재주 있으면 임용할 것이며..."


갑오경장이 시작된 첫 날인 1894년 6월 22일, 고종은 이러한 내용의 조칙을 내렸다. 여기에 호응하여, 갑오경장에 의해 입법기관 역할을 맡게 된 국군기무처는 '문벌과 반상의 등급을 혁파하고,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선용하는 건"을 반포하였다. 아울러 '연좌제를 폐지하는 건'과 '공사노비를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건', '역인驛人, 창우娼優, 피공皮工의 면천을 허락하는 건', '과부의 재혼을 자유에 맡기는 건'도 반포했다. 뿌리 깊은 봉건적 신분제도가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갑오경장 추진 과정에서 활약한 소장파 관료들은 예전 세도정치 시대에는 감히 이름도 댈 수 없었던 비주류 신분 출신들이 많았다. 김가진, 안경수, 윤치호 등은 서얼이었으며, 정병하, 고영희, 오세창 등은 중인, 이용익, 이하영 등은 평민이었다. 아울러 갑오경장으로 과거제와 향교가 폐지되고 근대식 교육제도와 공무원 임용제도가 도입된 것도 신분 차별에 따른 특정 계층의 관직 독점을 깨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갑오경장에서는 사농공상의 전통적 분업체제를 무시하고, 양반 출신이라도 자유롭게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개혁도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종전처럼 과거를 통해 고위직을 차지하거나 진사, 생원의 신분으로 무위도식하던 양반들이 대자본가로 변신하거나 중소상공인이 되어갔다.


다만 한계는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위에서 밀어붙이는 개혁이 그 오랜 기득권과 고정관념을 단번에 뒤집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가문을 따져서 혼인하고, '해방된' 노비들이 여전히 주인집에서 종살이하는 모습도 그런 예였다. '문벌가 반상의 등급을 혁파하고,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선용하는 건'은 이후 '가급적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라는 뜻'이라고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반상제를 폐지했으면 당연히 없어져야 할 양반의 여러 특권도 대부분 그대로 통용되었다. 특히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반드시 폐지해야 할 특권이었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무산된다. 이는 국권상실에 이르기까지의 고질적인 정부 재정난의 원인을 제공했다. 근대적 개혁과 부국강병을 위해 들어갈 돈은 많았으나, 양반 출신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니 그 돈을 마련할 데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갑오경장에 따른 신분제 철폐의 혜택을 가장 받지 못한 계층은 백정이었다. 가령 그들도 호적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붉은 점을 찍거나, 아예 백정용 호적부를 따로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보통 사람과 차별 받았다. 그리고 백정의 자녀는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입학허가가 나왔다면 그게 더 큰 일이었다. 사람으로 견딜 수 없는 가혹한 '왕따'를 당해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었으니까. 이런 상황은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나서도 1920년대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정들 스스로 '형평운동'을 벌여,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을 두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 사람은 이 땅에도 많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현실적으로' 신분 차별은 어쩔 수 없다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여왔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괴롭히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여기지 않고 살았다. 아무튼 그 자신이 괴로운 게 아니니까. 그런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사상이, 제도가, 경제체제가 필요하기는 했으리라. 그러나 차별받는 사람들 스스로의 노력이 없이는, 박해에 정면으로 부딪쳐 싸울 각오가 없이는, 결코 아무도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선택, 108가지 결정> 함규진, 페이퍼로드, 2008, 306-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