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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나라를 지키다 - 1323년 이제현의 입성책동 반대운동

강산21 2008. 10. 6. 23:57

홀로 나라를 지키다 - 1323년 이제현의 입성책동 반대운동


"한국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된다면?"

 

진담 같은 농담, 농담 같은 진담으로 종종 들리는 말이다. 어차피 작은 나라로서는 매사에 한계가 있다. 경제, 안보, 문화... 무엇이든지 초강대국 미국의 그늘 아래 있을 바에는, 아예 '화끈하게' 미국의 일부가 되자! 그래서 자랑스러운 성조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편이 이익이 아니겠는가?


농담이라도 기분 나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식의 이야기가 이 땅에서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그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강화도에서 40년간 항쟁하던 정권이 개경으로 환도하고 왕이 원황실의 부마가 됨으로써 '부마국가'로 존속하던 고려, 이렇게 종속상태로 지낼 바에는 아예 원나라의 일개 성省이 되고 말자는 주장이 진지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입성책동(立省策動)이라 한다.


첫 번째 입성책동은 충선왕 1년(1309)에 있었다.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던 중이었는데, 일찍이 몽고 편에 서서 고려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악명을 떨쳤던 부원배 홍복원의 손자인 홍중희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던 끝에 제기하였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고, 홍중희가 실각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두 번째 입성책동은 심상치 않았다. 충선왕의 뒤를 이은 충숙왕이 심양왕과의 권력투쟁으로 원나라에 잡혀가면서 정정이 불안해졌다. 그러자 유청신, 오잠이 원나라에 청원하여 "고려에도 성을설치하여 원나라 본국과 같이 만들어주소서"했다. 이번에는 원나라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하여, '삼한행성'이라는 이름까지 나돌았다. 이렇게 상황이 다급해지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사람이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은 15세 때 장원급제를 한 수재로, 혼란스럽고 몽고 간섭기의 고려에서 학식과 인품으로 홀로 고고한 빛을 발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을 짓고 학문 탐구에 전념할 때, 이제현을 불러 군신을 초월한 학우로 생활했다. 이 때 조맹부, 염복, 원명선 등 원나라의 명사들도 이제현과 교류했으며, 따라서 이제현은 부원배 아닌 지원파知元派로서 원나라 조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려인이 될 수 있었다.


"[중용]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국가를 다스림에는 아홉 가지 경도가 있다. 그러나 그 행함은 한 가지려니, 끊긴 대를 잇고, 망한 나라를 복원하고, 어지러우면 바로잡고, 위태로우면 도우며, 의연히 떠나는 자는 후히 대접하고, 달라붙는 자는 엄히 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세조께서 우리의 공로를 잊지 않으신 뜻을 살펴주소서."


그가 원나라 조정에 올린 상소는 우선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 "지금 고려를 기어이 병합하는 것은 대국의 풍도가 아니다."고 완곡히 지적하고, 원세조 쿠빌라이가 아리크부거와 경쟁할 때 마침 고려의 태자(이후의 원종)가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고려가 국체를 보전하고 고유의 풍속을 유지하기를 허용했던 일을 상기시키는 내용이었다. 원나라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면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뜻이 절절이 배어 있었다. 이제현은 이 외에도 원나라의 승상 배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에게 두루 연락하고 부탁하여 이들이 고려를 도와 입성에 반대하도록 운동했다.


이제현의 분투 덕분에 입성책동은 무산되었고,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책동이 있었지만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이제현은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그리고 공민왕까지 6대를 내리 섬기며 각 왕들이 원나라나 내부의 간신배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몸을 던져 보호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심화된 모순을 성리학적 해법에 따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개혁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뜻은 신진사대부들에게 이어져서 새로운 성리학 국가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의 속국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을 막아낸 대결단이었다."(정구복)


21세기 초엽인 지금, 우리는 아직도 14세기 초엽처럼 약소국 신세다. 그리고 하나의 초강대국에 여러 가지로 얽매인 처지다. 그 초강대국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때, 이제현처럼 그 한복판에 뛰어들어 결코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으면 우리의 입장을 떳떳이 지킬 수 있는 인재는 과연 있을까?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선택, 108가지 결정> 함규진, 페이퍼로드, 2008, 130-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