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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중에서

강산21 2008. 9. 12. 11:43

최근 읽은 권정생 선생님(교회의 종지기로 사시며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 수많은 아름답고 소중한 동화들을 지으시며 가난과 사랑을 실천하시다, 당신에게 들어오는 인세는 북한과 세상의 어린이들을 위해 쓰라 유언하시고, 빈 손으로 하늘로 가심)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을 보고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강아지똥처럼- 아름다운 배움을 주는 글이라 여겨져 직접 옮겨봅니다.

이제 곧 추석인데, 이런 때 내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도 생각해보시고

또 제가 올린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으시며 마음의 평화와 사랑을 일깨워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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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중에서>


.......이와 같이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 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다.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저녁 먹는 자리에서 빵을 떼어주며 “이건 내 살이라”했고,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이건 내 피다”라고 했다. 사실은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뒤에 있어질 자신의 살과 피의 갈 길을 가르쳐준 것이다. 세상의 모든 목숨은 희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온몸을 희생하고,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왔다. 어머니 아버지의 희생만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또한 하느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신 것은, 백번 옳은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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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회개를 부르짖고, 정의를 부르짖고,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해도,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도, 인간에게 따뜻한 정(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성서를 수만 번 읽고 외어도, 수만 명의 병자를 고쳐도, 일류 신학교의 박사학위를 받아도, 이런 소박하고 지극히 작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판순이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낳고 살이 없어 굶고 있다니까 자기 집 용단지의 쌀을 퍼가지고 가서 산모에게 밥을 지어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용단지의 쌀은 단순히 용신을 섬기는 단지가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비상식량 역할도 했던 것이다. 성주단지의 곡식도 마찬가지다. 흉년이 들면 그 곡식을 함께 나누어먹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참으로 많다. 가족 중에 누군가 먼 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 그릇씩 떠놓는다. 그 떠놓은 밥을 우연히 집을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한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일단 집에 찾아온 손님은 박대하지 않고 먹이고 재워준다.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렇듯 나누는 일은 철저했다. 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마저도 절대 혼자 먹지 않고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다. ‘고수레’로 들판에 던진 음식은 벌레도 먹고 새도 먹는다. 가을 감나무 꼭대기의 까치밥과 까마귀밥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과의 사랑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는 이런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서구인들이 마음대로 변질시켜 놓은 예수의 참된 복음을 깨닫는다면, 창조 이래 이 땅에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숨결을 금방 찾아낼 것이다. 나는 지금 20여 년 전에 내가 구상하고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는 떳떳하게 모든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섬기며 살고 싶을 뿐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원하셨기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서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며 그것을 위해 피 흘려 희생하신 것이다. 이 땅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랑도 상대를 위하여는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이 화평으로 이어준다. 그러나 정복자는 총칼로 상대방을 죽이고 다른 이득을 얻는다. 평화는 고요히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고로운 세상이다.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평화롭지 못했다. 아기 베개에다 좁쌀을 넣는 것은 난리가 나서 급할 때 가지고 가는 임시 식량이라고 했다.

 요사이는 모든 것이 싸워 이겨야 하는 세상이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수출경쟁에다 범죄와의 전쟁까지 벌여놓고 있다. 일해서 얻는다는 말보다 투쟁으로 얻자는 말이 더 많이 퍼져 있다. 우리 마을 앞 여기저기에 ‘골프장건설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걸린 지도 반년이 넘었다. 재벌과 농민들의 싸움은 또 다른 전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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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평화란 역설일지 모르지만 죽음이며 파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싸움이란 삶이 끝났을 때라야 우리는 제대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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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엔 온갖 종교와 철학과 미신들이 널려있어도 그 아무것도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평화는커녕 오히려 종파 간에 적대시하는 싸움이 있을 뿐이다. 수만 권의 경전을 쌓아놓아도 우리는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골치덩어리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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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 했다(마태 5,9). 여기 나오는 평화의 개념은 어떤 것인지,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대한 자기 몫 찾아주기, 정의가 살아나고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적 질서를 뜻한다면 분명히 정치권력과의 대결이 불가피한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참여와 투쟁으로 맞설 때 일어나는 또 하나의 싸움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써 앙갚음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비폭력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화염병과 최루탄, 돌멩이와 곤봉으로 맞서는 대신 어떤 방법이 또 있는 것일까? 권력은 철저하게 총칼과 군대로 무장을 하고 있는데, 맨손의 백성은 무엇으로 우리의 권리와 빵을 찾는단 말인가? 노예처럼 숨죽이며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삶이 진정 평화인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이 세상 폭력에 대항하는 비장한 운명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눠 먹이는 의식을 포도주와 빵으로 대체해놓았다. 포도주는 곧 피이며 빵은 살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가장 단순한 체험적 가르침인데도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해 못했다. 빵과 목숨은 하나인데 다른 두 개의 개념으로 생각할 때, 이 세상의 평화는 요원할 것이다. 반대로 한 덩어리의 빵을 곧 나의 살이며 나의 목숨이며 내 이웃의 목숨으로 깨달을 때 온 세계는 적이 없어질 것이다. 적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것이며 빵을 버리는 것은 내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피가 되고 내 피가 내 이웃의 피가 되고 그래서 인류는 한목숨 한 핏줄로 이어진 것을 알 때만이 평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어느 한사람, 그 어떤 위대한 몇 사람의 힘으로도 평화를 만들지는 못한다. 다만 인류가 함께 하느님의 형상대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이처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이 시대의 성인들이 아니겠는가?


<휴거를 기다렸던 사람들 중에서>

......... 몇 년 전에 서울 어느 달동네 교회 목사님은 목사직을 그만두고 미장이 일로 직업을 바꿨다고 했다. 정말은 목사직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목사가 되기 위해 미장이 노동을 택한 것이다.

 내가 한국의 목사님들께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사님도 사회의 직업을 하나씩 가지라는 것이다. 미장이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판사, 검사, 대학교수, 회사원, 공장 노동자, 거리의 청소부, 운전기사, 비행기조종사, 승무원, 초등학교 선생님, 고기 잡는 어부, 사과밭을 가꾸는 농사꾼, 어쨌든 할 수 있는 일이면 자신의 능력대로 일하는 목사님이 되라는 것이다. 함께 일하지 않고는 일주일 계속 책상머리에 앉아 설교준비를 해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설교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부 사정은 동무과부만이 안다. 일하지 않고는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나면 주일날 그야말로 넘치도록 충만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하면서 시간 있는 대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면 구태여 40일간 금식기도를 안 해도 영혼의 양식을 구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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