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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이 여자, 이숙의

강산21 2008. 9. 6. 13:43

이 여자, 이숙의
이숙의 저 | 삼인 | 2007년 08월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이숙의
1926년 7월 20일, 대구시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1940년 충남 공주여자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 4년 후 졸업하여 1944년 모교인 경북 의성읍 의성 중부국민학교 훈도로 부임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에서 좌익 대표로 연설한 박종근을 만나 1947년 6월 10일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12월 3일 남편 박종근은 공부를 더 하고자, 그리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고, 1948년 4월 딸 박소은(아명은 옥경)이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951년 남편 박종근이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1952년 3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남편 박종근은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전쟁 기간 동안 ‘빨치산’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남부군이 결성된 후 제3지대에서 책임자로 활동했다).
1953년 9월 10일 의성 남부국민학교로 복직했고, 1954년 8월 대구 중앙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복명국민학교로 다시 전근해 근무하던 1959년 8월 어느 날,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출감 후 다시 교직에 복직했고, 중앙, 복명, 대구국민학교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운 사실이 알려져 여러 차례 교육자 특공상을 받았다. 1963년 경북교육국 장학사(전국 초등계 초대 장학사)로 발령받았고, 1964년 경북 교육위원회 초등교육과 장학사로 임명되었다. 1973년부터 2년 동안 오스트리아에서 특수교육 연수를 받았고, 귀국해서는 경북도교육연구원 연구사로 일했다. 1976년 3월 남편 박종근 사망 신고를 했고, 1977년 사표를 제출하고 딸과 사위가 있는 서독(지금의 독일)으로 떠났다. 1990년 자서전 집필을 시작했다. 1995년 일시 귀국 중 해방 50주년 특집 〈말〉과 〈공동선〉에 처음으로 삶의 단상을 공개했다. 그해 12월 평양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약 2주간 체류, 남편 박종근의 열사증, 국기 훈장 및 영웅칭호 수여증, 조국 통일상을 받고 독일로 돌아갔다. 2000년 6월 그동안 거론되던 회고록 출간을 준비하러 한국에 일시 귀국했다가 8월 28일 대구 가톨릭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영면하였다.

 

짧은 행복, 긴 기다림

이숙의가 박종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에서였다. 충남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해 경북 의성읍 의성 중부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녀는 그날 행사에서 좌익 대표로 연설한 박종근을 보고 첫눈에 반했고, 박종근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둘은 1947년 6월 10일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석의 주례로 결혼식을 했고, 그 후 사촌 오빠 집에서 6개월 동안 시어머니와 세 사람이 5평이 채 되지 않는 방에서 신혼을 보냈다. 그해 12월 3일 박종근은 공부를 더 하고자, 그리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다. 출발하던 날 서울역에는 수많은 경찰들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떠나지도 못하고 경찰에 체포되는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본, 그것이 이숙의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모습이 되었다.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린 50년

그 후 소식 한 줄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짧은 신혼 생활에서 얻은 딸 소은, 시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살림을 꾸리며 살았다.
이숙의는 남편이 빨치산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1951년에 알았다. 그리고 1952년 3월 어느 날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고, 거기서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생포된 여자 빨치산 한 명이 박종근의 여비서 겸 간호장교였다고 밝히면서 그가 깊은 총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다니던 중 여러 동지들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증언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혁명가 박종근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법한 남편의 성정을 잘 알았기에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도 믿어지지도 않았다.
남편의 사망 사실이 공식화되자 비로소 그녀는 교직에 복직할 수 있었다. 1953년 의성 남부국민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여 1954년에는 대구 중앙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당시 생계를 위해 교직에 복직했으나 아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터이기도 했다.
복명국민학교에서 일하던 1959년에는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향 친구이자 당시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신순필 씨가 복명국민학교에 방문해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는데 후에 신순필 씨가 경찰에 잡혀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했고, 이에 간첩 혐의를 받아 체포된 것이다.
다행히 교사 생활을 하며 만난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그런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일생을 형무소 안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감 후 이숙의는 20년 가까이 교직에 헌신했다. 중앙, 복명, 대구국민학교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운 사실이 알려져 여러 차례 교육자 특공상을 받았고, 1964년에는 경북 교육위원회 초등교육과 장학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 후 딸 박소은 부부가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독일로 초청을 받았고, 사랑하는 딸과 헤어져 사는 아픔을 더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데다, 유신 교육의 폐단에 회의를 느끼던 터라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독일로 떠났다. 자서전 『이 여자, 이숙의』는 그녀가 처음 박종근을 만난 때부터 한국을 떠나 독일로 가기 전까지의 사연들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