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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와 전쟁

강산21 2008. 10. 8. 14:15

평화주의와 전쟁


세계가 전쟁의 혼란 속에 빠져있는 이 때, 평화주의 사상을 고찰해보는 일은 유용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지칭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연상시키기 때문인데, 사실 나는 절대적인 것에 회의적이다. 나는 예상치 못한 가능성에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한다. 극악무도하고 직접적인 악에 대항한 소규모의 집중적인 폭력행동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니(심지어 간디와 마틴 루터 킹 같은 강고한 평화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목적과 수단의 비율이 매우, 매우 달라진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집중적이지 않고 무차별적이며, 특히 기술이 극히 위험하게 쓰일 수 있는 우리 시대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죽거나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소규모 전쟁'(이란-이라크전쟁, 나이지리아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도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심지어 미국이 파나마를 상대로 일으켰던 것 같은 '극 소규모' 전쟁에서도 1천 명 이상이 죽었다.


[월스트리트저널] 2001년 10월 11일자에는 내셔널퍼블릭라디오의 스콧 사이먼이 쓴 '평화주의자들도 이 전쟁은 지지해야 한다'라는 칼럼이 실렸다. 여기서 그는 직접적인 공격자에 대한 집중적 저항을 허용하는 평화주의자들의 자기방어권을 이용해, 그가 '자기방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자기방어'라는 용어는 나라 전체에 폭격을 감행하고 공격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에 적용되지 않는다. 나아가 그 용어는 추구하는 목적을 행동이 달성할 가능성이 없을 때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전쟁의 거부'라고 정의하는 평화주의 매우 엄밀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쟁에서 수단(무차별 살상)은 직접적이고 확실하나, 목적은 그것이 아무리 바람직한 것이라 해도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평화주의는 '유화정책'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화정책이라는 단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쓰였던 말이며, 처칠, 체임벌린, 뮌헨을 언급할 때 따라 다니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듯 특정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경우에도,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유비를 만들어내는 전략은 전쟁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편리하게 쓰이곤 한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다는 주장에도 '유화정책'이라는 단어가 붙여졌다.


그러면 그 유사관계를 한번 점검해 보자. 탐욕스러운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가 양도됐다. 독일은 자신의 힘을 팽창시키고 있는 공격적인 나라였고, 그 팽창에 도움을 준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달래기가 필요한 팽창주의 열강이 아니다. 미국 자신들이야말로 팽창주의 열강이며(두 나라와 전쟁 중이고, 전 세계에 군대를 배치하고, 바다마다 해군 함대가 떠 있다), 바로 이점이 서안과 가자지구에까지 손을 뻗치는 이스라엘의 팽창정책과 더불어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중동에서 우리 군대를 철수하는 일이나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화정책이 아니다. 이것은 정의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이 저지르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테러리즘에 승복'하거나 '유화정책'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전쟁이 아닌 다른 수단을 요구하는 일이다. 킹 목사와 간디 모두 행동, 즉 전쟁보다 더 강력하고 전쟁보다 더 확실한 도덕적 옹호가 가능한 비폭력 직접행동을 신뢰했다.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평화주의가 지금껏 풍자됐던 것처럼 '다른 쪽 뺨도 대주는' 일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를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일이다.


미국은 9.11 공격을 모든 가능한 정보와 수사방식을 활용해 그 용의자들을 체포해야 하는 끔찍한 범죄행위로 다룰 수도 있었다. 유엔을 통한 다른 나라들과의 협조 아래, 그 사건에 가담한 이들을 추격하고 체포할 수도 있었다.


또한 협상의 길도 있었다("뭐라고? 그런 악마들과 협상을 한다고?"같은 말은 말자.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악마같은 정부들 몇 곳과 협상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권력을 주기도 했고 그 권력의 유지를 돕기도 했다). 부시가 폭격 명령을 내리기 전에 탈레반은 빈 라덴을 재판정에 세우는 카드를 제안했다. 이 제안은 무시됐다. 열흘 간의 폭격 이후 탈레반은 폭격중지를 요청하면서 빈 라덴이 제3국에서 재판을 받도록 그를 넘기기 위한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의 헤드라인은 "대통령, 탈레반의 협상제안 거절"이었고,"내가 협상은 없다고 말했을 때는 정말 협상은 없는 것"이라는 부시의 말이 인용됐다.


부시 대통령은 마치 전쟁에 광분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왔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제1차 걸프전쟁, 유고슬라비아 폭격의 초기에도 이와 비슷하게 협상 가능성을 거부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인명의 손실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나타났다.


국제적인 경찰활동과 협상이 전쟁에 대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 우리가 빈 라덴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혹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알카에다 전체 조직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해도 테러리즘의 위협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테러리즘의 잠재적 후보자들은 알카에다를 초월해 도처에 존재한다. 우리가 이라크에서 보고 있듯이, 수백 건의 폭탄 테러를 지휘했던 아브 무사브 알 자르카위를 죽인 것이 차량폭탄과 자살공격의 속도를 늦추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폭력은 더욱 급증했다.


테러리즘의 뿌리에 도달하는 일은 복잡하다. 하지만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은 간단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매우 새로운 상황에 낡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형언할 수도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테러행위의 핵심에는 분노가 있다. 직접 테러리즘에 가담하지는 않아도 그 밑바닥에서부터 격렬한 절망감을 뿜어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분노가.


이런 분노를 가져오는 씨앗은 두 가지이다. 서구, 특히 미국의 막대한 부와 사치스러움에 대조되는 전 세계 곳곳의 극심한 비참(기아, 질병), 그리고 전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하는 미국의 군사력이 억압적인 정권을 뒷받침해 주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무력 개입을 일삼아왔다는 사실이 바로 그 두 가지 분노의 씨앗이다.


이런 사실은 곧 테러리즘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정당한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미 수 만 명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기는커녕 이라크 전역을 유례없을 만큼 불안정하게 만들어 놓은 미군의 이라크 점령을 즉각 종식시켜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당장 점령지에서 철수하라고 이스라엘에게 주장해야만 한다. 상당수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철수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래야만 이스라엘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겸손한 국가가 되어보자. 그러면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다. 이 세계의 겸손한 국가들은 테러리즘의 위협을 마주칠 일이 없다. 요컨대 군사적인 강대국이기를 그만두고 인간적인 강대국이 되도록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대외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하기를 쉽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변화는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들, 즉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 군부의 야망, 정부의 막대한 군사적 개입에서 기업들이 얻어내는 이윤 등을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시기에서 그랬듯이, 오직 미국의 시민들(지금보다 훨씬 나은 정보를 접하고, 애초부터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을 지지하게 만들었던 본능을 되돌아보게 된 시민들)이 변화를 요구할 때에만 찾아올 것이다. 시민이 여론이 바뀌면, 특히 이와 더불어 정부가 폭력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용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면, 군사적 해결책에서 한 발 물러서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담당할 역할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 역시 좋은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되돌아봄이야말로 미국인들에게는 진정한 안전의 약속이 될 것이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시작이 될 것이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난장, 2008, 105-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