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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찰, 군인인가 경찰인가

강산21 2008. 6. 26. 20:22
 

전투경찰, 군인인가 경찰인가


집회가 있는 곳이나 관공서, 대사관 등의 시설에 대한 경비를 맡는 경찰을 보통 전투경찰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학하게 말하려면 '전의경'이라 해야 한다.


보통 전투경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크게 '의경'과 '전경' 두 가지로 나뉜다. 경찰서나 지구대 앞에 '의무경찰 모집' 공고가 1년 365일 붙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군 복무를 하긴 해야하는데 군대가 아닌 경찰서에서 하고 싶다고 자원하는 경우가 의무경찰이고, 군에 갔는데 경찰로 차출된 경우가 전투경찰이다. 그렇지만 정식 명칭은 더 복잡해서 의무경찰은 '의무전투경찰순경', 전투경찰은 작전전투경찰순경'이다. 여하튼 의경이든 전경이든 공통점은 '전투경찰순경'이라는 것이다.


경찰이라 불리고, 실제로 경찰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의 신분은 사실상 군인이다. 군 병력을 경찰이 빌려와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은 군인이 경찰업무를 하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과 같은 전의경 제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애초 시작은 한국 전쟁 때에 이승만이 군 병력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미국에게 넘긴 다음이었다. 지리산 일대의 '빨갱이' 무장 세력을 소탕하려면 군사작전을 벌여야 하는데, 미국의 허가 없이 병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묘안을 짜냈다. 바로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경찰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공비 토벌'이 끝난 다음 전투경찰은 그 효용을 다했다. 전투경찰의 설치 근거였던 '서남지구대특별법'도 폐기되었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전투경찰을 부활시킨 것은 박정희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전투경찰대설치법'을 제정해 물꼬를 텄고, 데모진압을 위해 본격적으로 전투경찰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권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전투경찰대설치법에 '치안 업무 보조'라는 여섯 글자를 집어넣어, 전투경찰이 다양한 경찰 업무에 종사할 수 잇도록 했다. 그 핵심은 기동대라 불리는 시위 진압용 부대의 창설이었다.


어느 나라든 군대가 아닌 경찰에게 치안 업무를 맡기는 것은, 작전 수행을 위해 과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군대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치안업무를 맡게 될 때 발생하는 인권 침해 때문이다. 군대란, 앞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돌격만 하면 될 터, 그 과정에서 적법절차 원리를 준수한다는 것은 애당초 사명에서 빠져 있다. 고지를 점령하러 올라가면서 원본으로 된 영장을 보여 줄 리도 없고, 3회에 걸쳐 사전 경고를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경찰은 다르다. 경찰 활동의 핵심은 적법절차 원리이다. 적을 대상으로 싸우는 군대와, 주권자요 납세자인 국민을 대하는 경찰이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의경이 주로 맡고 있는 집회, 시위 진압 업무도 그렇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이고, 민주사회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권리이다. 집회와 시위를 하는데, 곧 국민이 일상적으로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는데, 전투를 목적으로 창설된 특수부대가 이에 대한 진압을 맡는다는 설정 자체가 위헌이다. 전투경찰의 활동은 상시적 계엄 상태를 연상시킨다.


전의경이 하는 일은 데모 진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경찰 간부들의 각종 심부름부터 운전, 경찰관서 지키기 등 경찰의 각종 허드렛일도 그들의 몫이다. 말이 좋아 '치안 업무 보조'이지, 실제로는 각종 잡일 전담이다. 게다가 집회 현장 같은 곳에서 보면 오히려 직업경찰관들이 전의경의 업무를 보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하루 종일 지키기도 하고, 세계 최강의 미군 부대를 달랑 작대기 하나 들고 지켜 주기도 한다.


온갖 궂은 일을 처리하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32평 내무반에 110명이 생활하는 것이 보통인데, 1인당 차지하는 면적은 겨우 0.29평이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재소자가 차지하는 공간의 절반도 안된다. 상황이 있을 때는 그냥 버스에서 자거나 강당이나 복도같은 곳에 매트리스 한 장 펴놓고 잘 때도 많다.


평균 출동 시간도 휴일없이 매일 13시간쯤 된다. 진압 훈련이나 개인 정비 시간을 빼도 이 정도다. 고된 생활의 연속인 데다 군기도 일반 현역병보다 심하다. 자살도 현역 군인에 비해 2배나 많다. 2012년에 전의경 제도가 폐지된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갈수록 인원이 줄어들게 되는 앞으로 몇 년이 더 큰 문제다. 그 시기에 전의경으로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은 줄어든 인원만큼 더 혹사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의경을 폐지하겠다던 노무현 정부의 방침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강제 노동은 딱 두 가지뿐이다. 군인과 재소자의 노동이다. 전의경의 경우에는 군대에 갔지만 '경찰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겨우 몇 만원 말고 제대로 된 급여도 받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일에 강제로 종사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강제노역이다. 군사독재 정권의 잔재이며, 위헌적 강제노역인 전의경 제도를 없애는 것은 실종된 우리 사회의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상식을 복원하기란 참 힘들다.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오창익, 삼인, 2008, 3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