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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일럼의 마녀재판

강산21 2008. 5. 19. 18:04

세일럼의 마녀재판


마녀재판은 흔히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에 있었던 일로만 생각하기 쉽다.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탐욕스럽고 부패한 성직자들이 종교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악마의 추종자로 모함한 끔찍한 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녀 재판의 원인을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다.


1692년 신대륙 아메리카의 메사추세츠 세일럼이라는 고장에서 대규모 마녀 재판이 열린다. 150명 이상의 사람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29명이 마녀라는 이류로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걸었다는 이유로 마녀 재판을 받는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중 14명은 여자, 5명은 남자였다. 1명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적어도 5명 이상의 사람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세일럼의 마녀 재판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그 규모와 파장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어두운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마녀 재판은 무엇보다도 혹독한 고문이나 합리적 근거가 없는 판단 방법으로 유명하다. 일단 마녀로 지목되어 조사나 재판을 받게되면 혐의를 벗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린 다음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오면 사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그대로 익사하면 억울한 것으로 인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세일럼에서 동원된 '증거'에도 황당한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마녀 케이크'와 '접촉 시험'이다.


마녀 케이크는 영국의 백마술에 기원을 둔 것인데 특히 소녀들을 괴롭히는 마녀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마녀의 저주에 걸려 미쳐버린 희생자 소녀의 소변을 호밀과 섞어 케이크를 만든다. 이 케이크를 개한테 먹이면 소녀에게 저주를 건 마녀는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녀가 저주를 걸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를 소녀에게 주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소녀의 소변에 남는다. 따라서 소녀의 소변이 섞인 케이크를 개가 먹으면서 이 입자를 씹으면 마녀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마녀 케이크의 논리였다. 이런 미신적인 방법이 마녀를 찾아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발산의 원리'라는 데카르트의 이론(!)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한다. 마녀는 눈에서 독이 있고 악의에 가득 찬 입자를 발산한다는 것이다.


접촉시험도 유사한 이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눈을 가린 채 발작 상태에 빠져있는 희생자 소녀들에게 끌려간다. 마녀 후보자들이 소녀들에게 다가가서 몸에 손을 대면 소녀들은 발작을 멈추고 몸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면 유죄판정을 받는 것이다. 마녀들은 눈으로 사악한 입자를 발산하는데 눈을 가렸기 때문에 그 입자가 차단되고 손이 희생자의 몸에 닿는 순간 이미 발산했던 입자가 마녀의 몸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다. 미신에 사로잡힌 소녀들은 마녀 후보자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스스로 발작에 빠졌고 눈을 가린 '마녀'의 손이 닿으면 순식간에 괜찮아졌다.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었다.


마녀 재판은 희생자의 고발로 시작된다. 가족의 죽음이나 병, 재산적 손실을 겪은 사람이, 그것을 마녀의 술책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치안판사에게 고발장을 제출한다. 치안판사는 고발장을 검토한 다음 마녀로 지목된 사람을 체포해서 공개적인 신문을 한다. 이 신문이라는 것은 결국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다. 치안판사에 의해 마녀로 인정된 사람은 법원으로 이송되고 배심원들에 의해 기소된다. 죄명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희생자에게 마법으로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악마에게 충성을 바치는 맹세를 했다는 것이다. 기소가 되면 그날로 재판에 회부되는 경우도 꽤 있었는데 재판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형에 처해졌다. 임산부들은 집행을 유예받기도 했지만 출산을 마치고 나면 교수형에 처해졌다.


범행을 자백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고문은 혹독했다.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던 자일스 코리라는 여든 살의 노인이 그런 경우를 당했다. 판사는 그의 몸 위에 나무판을 얹어놓고 그 위에 천천히 돌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이틀 동안 조금씩 더 많은 돌이 올려졌고 코리는 가슴이 으깨진 채 죽음을 맞았다. 그는 끝까지 사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녀로 몰린 사람들은 재판도 받기 전에 재산을 몰수 당하곤 했다. 사형 집행을 당한 후에도 고난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죄인들은 교회로부터 파문 당했고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교수형을 당한 시체는 아무렇게나 매장된다. 유족들은 어둠이 내린 다음에 몰래 시체를 수거해서 가족 소유의 땅에 아무런 표지 없이 묻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녀로 몰려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은 공식 서류에도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다.


왜 세일럼에서 이런 식의 마녀 재판이 있었을까.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종교의 자유를 추구했다. 식민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도 구대륙과는 비교하기 어려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이고 잔혹한 마녀 재판이 다시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은 간단하지 않다.


당시 신대륙의 식민지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와 이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혹독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기후와 병충해는 한 해 농사를 순식간에 망치기 일쑤였다. 한정된 경작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웃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특히 인디언과 접경한 서부지역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농토를 넓히기 위해서 서쪽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인디언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차이는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자신들이 인디언에게 당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누군가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식민지 사회는 희생양을 찾게 되었다. 마녀 재판에서 고발을 한 사람들이 주로 인디언들의 주거지와 경계에 살던 사람들이고 사탄이 인디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악마가 인디언들의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악마와 내통한 것으로 몰려 희생 당하게 된다. 마녀 재판의 원인은 결국 사회의 어려움을 약한 희생자에게 돌림으로써 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외부의 적과 만났을 때 내부의 희생양을 찾아 구성원들의 단결을 이뤄내고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것은 역사상 흔히 있던 일이다. 중세 유럽에서 있었던 마녀 사냥도 흑사병과 십자군 운동으로 인한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병이 전염된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의 지식으로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흑사병의 원인을 악마와 내통한 마녀의 짓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 냉전 체제 아래서의 매카시즘의 발호,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그리고 9.11 이후 이슬람 교도에 대한 편견과 차별 등 마녀 재판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례 중 많은 경우에 법이 희생자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약자를 괴롭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법률가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법의 역사에서 어두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디케의 눈> 금태섭, 궁리, 2008, 83-89

출처 : 광명한길교회
글쓴이 : 선한이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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