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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주장과 우리의 고백

강산21 2008. 5. 21. 14:59
 

도킨스의 주장과 우리의 고백


여러분 가운데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을 읽어보신 분이 있는가요? 도킨스가 기대하듯이 그 책을 모두 읽은 뒤 여러분이 유신론자에서, 또는 불가지론자에서 무신론자로 전환하는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도킨스는 2강에서 거명했던 마르크스, 프로이트, 클리포드, 러셀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근대주의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우리가 분류했던 증거주의적 무신론과 혐의론적 무신론 두 유형을 도킨스에게서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보통의과학적 가설"이라 보면서 이 가설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것이 신의 존재를 확증할 수 없는 이유로 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신이 없다는 가정 하에 사는" 사실상 무신론자에 속한다고 보지만 "융이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것만큼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강한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도킨스는 전형적인 증거주의자의 노선에 선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은 인간의 망상이요 환각이라고 보는 점에서 혐의론적 무신론에 속합니다. 도킨스는 그의 선배 무신론자의 관점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의 부재에 대한 도킨스의 적극적인 논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궁극적 보잉 747논증'이라고이름 붙인 논증입니다. 도킨스는 이 논증이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반증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 논증은 신의 존재가 비록 학술적으로는 반증 불가능하더라도, 사실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도킨스는 강하게말합니다. '궁극적 보잉 747논증'은 프레드 호일의 "보인 747과 고물 야적장"의 비유에서 따온 것입니다. 호일에 따르면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 야적장을 휩쓴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 낼 확률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복잡한 것은 복잡한 만큼 발생할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보잉 747과 같은 복잡성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적 설계자를 도입하는 것은 마치 '궁극적인 보잉 747'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고 이러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도킨스는 주장합니다. 가장 복잡한 존재여야 할 신이 출현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신은 통계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도킨스가 신을 착각 또는 망상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일 신을 "우주와 우리를 포함하여 그 안의 모든 것을 의도를 갖고 설계하고 창조한 초인적, 초자연적 지성"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선물로 출현할 수 있다고 도킨스는 일단 가정합니다. 따라서 신은 세계의 기원에 앞선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진화 끝에 오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착각이고, 유해한 착각이라는 것이 도킨스가 자신의 책을 통해서 변호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신은 대단히 복잡하므로 [존재할] 개연성이 거의 없다"는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앨빈 플란팅가가 보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 전통을 따라 보면 하나님은 '복잡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사물과 속성, 현실성과 잠재성, 본질과 존재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라는 뜻이지요. 또한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부분이 없으므로 복잡성 운운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복잡성에 대해서 도킨스 자신이 내리고 있는 정의를 따라 보더라도 ("부분들이 우연만으로는 출현할 가능성이 낮은 방식으로 배열된 존재") 하나님은 복잡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는 이 부분, 저 부분으로 나눌 수 없고 부분들의 결합이나 배열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킨스가 주장한대로 신이 복잡한 존재라고 일단 수용해 보지요.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는 그렇지 못한 존재보다 더 복잡하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더 복잡한 존재라 부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아시므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도킨스처럼 그러한신은 존재할 개연성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도킨스가 하고 있는 주장은 플란팅가가 지적하고 잇는 것처럼 유물론적 입장을 수용할 때에야 가능합니다. 만일 유물론이 참이라면 신이 존재를 수용하는 유신론은 거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법은 쉽게 알아챌 수 있듯이 일종의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신론이 거짓임을 얘기하자면 유물론이 참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문제는 유물론을 수용하는가, 유신론을 수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도킨스는 자신이 유물론자임을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지만 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그의 세계관이 유물론자임을 분명히 드러납니다.그는 유물론자이면서 이것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리학에서 말하는 소립자에서 출발해서 점점 복잡한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는 가정 없이, 신을 진화의 최종 산물이라 부를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진화된 존재는 유신론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 하더라도 물질의 총합인 자연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을 뿐 창조주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만일 좀 더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의 출현이, 예컨대 생명의 출현이 고물 야적장에서 보잉 747이 조립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도킨스가 확신하는 것처럼 자연선택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 훨씬 설명의 부담을 더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도킨스는 우리가 어릴 때 물던 것처럼 묻습니다. "그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느냐?"고요. 기독교의 답은 이것입니다. "창조주는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있거나(in se esse) 다른 것으로부터 있다(ab alio esse)"고 말한 것처럼 존재하는 것을 자존적 존재와 의존적 존재로 나누어 보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요?


도킨스와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드높은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 부재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설득력이 없지만 종교가 현대 세계에 미치고 있는 부정적인 해악에 대한 그의 지적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킨스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논파하는 것은 철학자와 기독교 과학자, 신학자들이 맡아 해야 할 일이지만 현대 세계에 미친 종교의 해악과 관련된 부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고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관심 가져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시 물어보도록 하지요. "아버지이시고, 전능자이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라는 나의 고백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교회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루터 박사의 소요리 문답>(Dr. Luther's Enchiridion: Der Kleine Cathechismus) 가운데 사도신경 첫 고백 부분에 대한 해설을 함께 보기를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강영안, IVP, 2007, 268-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