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나는 왜 개헌을 말하는가’

강산21 2007. 3. 14. 12:19

‘나는 왜 개헌을 말하는가’
대통령 국무회의 즉석연설 전문

 

개헌발의에 대해 여러분들께 당부를 좀 드리고 싶습니다. 불확실한 일을 하라고 하면 잘 되지 않습니다. 불확실하더라도 가치에 대한 확신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으면 합니다. 대통령이 제안한 일이긴 하지만, 여러분도 판단해서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야 비로소 불확실한 일에도 정성을 쏟을 그런 동기가 생길 수 있는 것이죠. 또 설사 가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꼭 이 시기 이 시점에서 불확실한 일을, 성공이 불확실한 일을 하려고 하면 역시 그래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을 때라야 과정 자체,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고, 과정 자체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때라야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과연 개헌이라는 주제가 결과를 얻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다음에 가치가 있다면 결과를 얻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냐. 설사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고, 그 가치가 축적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국무위원이고 또 정부 기관장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국민입니다. 국민의 일원인 한 개인으로서 자기의 소신과 정부의 정책이 일치될 때라야 국무위원으로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가치 있는 일인가’ ‘될 때에만 가치 있는 일인가’ ‘설사 안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과정이 가치가 있고 축적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우리가 내 걸은 헌법개정, 왜 필요한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매 시기마다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국민들은 이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죠. 말하고 행동하는 동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구가 있고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있을 때, 그 요구가 역사진보의 방향과 일치하게 될 때, 그 국민의 요구는 사회변혁의 커다란 힘이 돼서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과 결합되고, 결합돼서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강렬한 욕구와 희망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4.19 그 쯤에서 봤을 때 반공논리를 전제로 한 억압의 기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고, 반면에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했던 경제적 욕구는 그대로 억압되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 두 개의 욕구들을 적절하게 조절해 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소위 5.16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군사정권이 성립했습니다.

군사정권이 역사의 방향에 일치했든 안 했든 유지될 수 있었던 요소는 결국 △공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억압의 기제가 살아 있었고 △소위 안보독재 또는 반공 독재를 할 수 있는 강력한 억압의 명분이 살아 있었고 △국민들이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존재했었고 △한쪽에서는 우리도 잘 살아 보자고 하는 강렬한 욕구를 지배의 정당성과 결합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재정권이 체제를 상당히 오랫동안 끌고 갈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경제발전과 독재가 필연적으로 결합되느냐 하는 데 대해서, 말하자면 경제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독재를 해야 되느냐 하는 이 필연적 과정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 당시에 논쟁할 수도 없었고 논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필연적 과정이다’ ‘아니다’라는 데 대해서 무슨 정설은 나와 있지 않고 대체로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화는 그들의 공로다’ ‘군사 독재의 결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민주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은 필수적인 과정이 아니라 다른 선택도 있었고 다른 길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역사적으로 그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기 다른 선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선택을 했지만 결과에 있어서 우리는 경제성장이라는 결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산업화의 공로는 인정해 준다’ 이런 수준의 사회적 공론이 형성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시기에는 국민들 욕구의 일부를 적어도 결합시켜 냈고, 일부의 결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아주 기본적인 요구를 결합시켜 냈고 만들어 냈기 때문에, 소위 독재정권의 지속적 지배가 가능했던 것이죠. 그래서 여론조사를 하면 그 시기 지도자에 대한 지지가 높죠. 그래서 그 시기를 역사의 발전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라고 봐야 할지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떻든 결과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강렬한 또 하나의 욕구는 자유에 대한 욕구입니다. 인간적 대우에 대한 욕구, 그것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죠. 그것이 강력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수모를 당하지 않을 인간적 자존심 같은 것에 대한 욕구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꾸준히 끓어올랐고 결국 87년에 와서 6월항쟁이라는 것으로 독재정권이 이제 한발 물러섰다든지 항복했다 할지 하는 것으로 해소가 됐습니다.

이 욕구는 우리 한국의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 중장기적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가 보편적 가치로 결합됐고, 이 보편적 가치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독재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리더십과 결합이 돼서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소위 직선에 의한 정부를 가져온 것이죠.

6공화국은 헌법상으로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헌법에 의해서 선출된 절차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과거 군사 쿠데타에 뿌리를 둔 세력이어서 도덕적 정통성에서 여전히 하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그것을 포함해서 20년 동안 꾸준히 우리 국민들의 개혁욕구에 의해서 지난 20년이 진행돼 왔습니다.

6공화국 시절에도 상당한 민주주의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독재 시기에 이뤄졌던 억압의 체제, 제도 또는 특권의 체제, 부패의 체제, 권위주의의 체제, 이런 구시대적 봉건적 질서를 청산해 나가는 데 대한 우리 국민들의 요구가 강력히 존재했기 때문에 20년 동안에 그렇게 진보돼 왔습니다.

개혁이라는 주제가 그 동안 쭉 국민들의 역동성을 모아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그것도 강력한 욕구로서 존재했고요. 지금 국민들에게 ‘개혁합시다’ 하면 국민들이 시큰둥하죠. ‘민주주의 합시다’ 시큰둥하죠. 이후에 한국사회 역사발전 과정이 뭐냐는 것이죠. 역사발전의 과제가 뭐냐. 국민들한테 ‘당신들의 욕구가 뭐요?’ 하면 ‘경제’라고 한마디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경제 발전의 전략이 뭐요?’라고 물으면 전략론에 가서는 바로 갈라지게 돼 있습니다. 지방과 중앙이 갈라지고, 그 다음에 민노당 노선과 또 절대적인 기득권 계층 사이에도 갈라지고, 소위 중도라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경제 문제에 관해서 풍요한 사회로 가는 전략에 있어선 상당히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다음시대 우리가 해 가야 되는 것이 뭐냐에 대해서 개별 개별 지역적으로 집단적으로 개인적으로 모두에게 강렬한 욕구가 있지만, 이 문제를 동시에 풀어 나갈 수 있는 보편적 욕구로서, 또는 보편적 가치로서 전환된 그 욕구의 해소방법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 참 어려운 시기에 와 있는 것이죠. 다음 시기에 ‘여러분의 희망이 뭐냐?’ 하면 풍요로운 사회에 대해서는 좋습니다. 공정한 사회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략이 뭐냐라고 물으면 답이 안 나오기 때문에, 말하자면 국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 욕구가 뭐냐라는 것을 짚어내기가 어렵고, 보편적 욕구가 역사의 퇴행이 아니라 진보의 방향으로 맞아야 된다는 과제를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보편적 요구를 가장 강력하게 묶어 냈던 지도자가 누구냐 하면 히틀러거든요. 국민들이 대개 질서를 원하고 변화를 원하고 안정을 원하고 성장을 원하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어떤 절반의 것이라도 그 어느 한 집단이라도 여기에 대해서 보편적인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의 욕구에 영합하는 리더십 영합적 가치, 영합적 리더십이 국민들의 정서를 선동을 통해 끌어 모았고 역사를 뒤로 끌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됐던 것이죠.

우리 한국은 그때의 상황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역사가 그렇게 반동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 기간 우리 정치가 표류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민주화까지 수 십 년간 우리의 비전을 가지고 국민들을 민주주의 방향으로 끌어왔는데, 개혁 가지고 20년 끌어왔는데 이제 ‘개혁’ 두 마디 가지고는 안 되게 생겼단 말이죠. 여기에 우리 사회 비전을 무엇으로 제시할 거냐, 하는 이런 문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저 막연하게 경제성장, 민생해소 지금 그것 뿐이죠? 지금의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라든지 그런 것이 잘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그 비전이 없냐? 참여정부의 공약은 실제로 내용이 무엇이었든 과거의 것이었습니다. 개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을 왜 찍었소?’ 이렇게 물어보면―직접 물어보진 않았습니다만―많은 사람들한테 ‘왜 내가 대통령이 되었을까?’ ‘어째서 사람들이 나를 찍었을까?’―물론 그것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만―‘절반의 사람이라도 왜 뭉쳐서 나를 찍었을까?’ 아마 새로운 정치라고 하는 것이 가장 주요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은 오늘날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오늘 이 시점에서 국민들한테 새로운 정치의 기치를 들고 나와서 과연 누가 얼마만큼 성공할 것이냐. 지금은 오히려 아주 과장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무능해도 좋다. 경제나 살려라.’ 이런 수준이죠. ‘아, 부패해도 좋다. 경제나 살려 내라.’ 뭐 이런 식의 구호까지 나오는 시점이 됐다는 말이죠. 그걸 국민들이 쉽게 받아들이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수준으로 얘기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정치’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개혁의 욕구는 이제 역사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정치적 리더십의 동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두 개 다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리더십의 동력도 될 수 없고, 역사발전의 동력도 될 수가 없고.

참여정부가 동반성장을 내 보고, 또 양극화 해소라는 걸 내걸고, 균형발전을 내걸기도 하고, 그 다음에 2030 사회투자의 주제를 내 놓기도 하고, 또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제기하기도 하고 하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대한 전략적 비전을 만들어 국민들 앞에 제시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입니다. 그러니까 비전 2030이라는 것이 여러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종합하고, 우리 한국의 오늘날 현실적 과제를 아주 나름대로 열심히 분석해서 ‘우리가 가야 되는 것이 뭐냐’ 그래서 내놓은 여러가지 전략들 가운데 맨 처음 우리가 내놓은 것이 ‘원칙대로 간다.’ 이것이 첫 번째 전략이었습니다. 심지어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원칙대로 간다’ 이런 것이었죠.

두 번째로 ‘혁신이 답이다.’ 그래서 과학기술, 과학기술 혁신, 인재양성…. 그래서 교육부가 국민의 정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가 되고 이제 그 부처 장을 부총리로 하게 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혁신 쪽으로 우리가 방향을 잡았던 것입니다. ‘혁신이다 답이다’ ‘인적 자원이 답이다’ 했거든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과학 기술이 답이다.’ 그게 우리 참여정부가 내놓은 카드입니다. ‘과학기술이 답이다’ 이렇게 모아서 생각해 보면 ‘혁신이 답이다’ 이거죠. 정부혁신까지 이제 갔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실천했던 것이 뭐냐면, ‘원칙이 답이다’. 이 내용은 전부 풀어 보면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 이런 것이죠. 그러면서 원칙 중심의 사회, 이런 것을 오늘날 경영학 이론에서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얘기를 하죠. 그 사회의 경제가 성공하고 그 사회에서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으로서 소위 사회적 자본의 토대로서 소위 사회적 자본을 얘기하죠. 그 문제가 바로 그것은 민주주의, 아까 원칙으로 말했던 것과 민주주의라고 얘기했던 것, 이 모든 것이 전부 같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2003년, 2004년에 소위 가계 신용위기, 신용불량자 문제라든지 이런 것이 어느 정도 극복되고 금융위기, 뭐 이런 위기적 상황들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 우리가 제시했던 것이 동반성장전략이었죠. 그런 이론들이 쭉 발전하고 다듬어져서 이제 2030이란 이름으로 나왔고, 그것이 사회투자전략이고 구호로서는 ‘함께 가는 희망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국민이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는 사회에서 쾌적한 환경과 품위 있는 문화를 누리는 사회’ 그리고 ‘오늘의 불안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서 대책이 있는 사회’ 아니겠습니까? 불안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대책이 있는 사회, 그것이 경쟁력이 있는 사회이므로 이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고 여기에 대한 것은 결국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 우리 사회 환경에 대한 투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이름 붙여서 사회투자라고 이름 붙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복지 고도화, 대개 이렇게 해서 성장과 복지를 균형 있게, 그리고 복지를 투자라는 개념으로 전환해서 비전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주로 이것이 이제 경제사회 분야에 있어서의 비전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많은 갈등들이 존재하게 되어 있죠. 우리가 이 목표를 향해서 가는 데에도 많은 갈등들을 극복해 나가야 하고, 그거 외에도 외부에서 계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의 도전과 위험 요소들에 대한 대응도 해 나가야 됩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성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이냐, 이런 것에서부터 외부적 위협과 내부적인 갈등들을 우리가 쭉 대응하면서 극복해 나가야 되는 것인데, 결국 여기서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 이것을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정치체제입니다. 정치제도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의견의 대립과 이해관계 갈등들을 어떻게 잘 통합시켜서 서로가 의심과 불신 속에서 전부 안 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상호 간에 투자하고, 그 투자를 통해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들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말하자면 능동적이고도 도전적인 그리고 불안에 대해서 회피가 아니라 도전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려고 하는 그런 사회의 역량을 어떻게 만들어 갈 거냐. 거기에 우리가 지금 있습니다. 그게 이제 정치적 비전에서 우리가 말했던 상생이라는 것이죠. 넓은 개념을 가집니다만, 우선 대화의 정치, 타협의 정치, 이게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본질이죠.

대화의 정치, 타협의 정치. ‘타협’이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가치도 존중하고, 상대방의 요구와 주장도 존중할 줄 알아야 되고, 그것을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을 찾아 나가고, 그 다음에 서로 이해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절하게 조절하고, 그래서 상호의 양보를 통해서 또는 상호간에 긍정적 투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역량을 결집시켜 나아가는 사회문화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이게 민주주의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국민통합’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만, 국민통합, 개혁·통합이라고 했는데, 참여정부에서 개혁은 뭐 이전부터 했던 걸 얼추 마무리 다 해 온 것 같고 통합 부분은 아직 제대로 못 나아가고 있죠. 노사정 대타협도 못 했고, 지역 간 통합도 잘 못했고.

저는 통합이라는 것을 놓고 얘기하면서 ‘나뉘어서 서로 대결하고 경쟁하다가 하나로 통합돼 나가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제도와 기술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 놓고, 상당히 제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는데요. 얼마 전에 무슨 책을 보니까 1787년 미국 헌법을 만들 때, 메디슨이라는 사람이 연방 헌법 제정에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디다. 그 사람 무슨 기록 속에 정당에 관한 기록 얘기가 나왔는데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정당을 나누어서 서로 대립·투쟁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국가적 통합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써 놨더라고요. 그래서 민주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정의가 여기에 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누어서 서로 비판하고 갈등하고 투쟁하고 경쟁하면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통합시켜 나가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이것을 가져야 제가 말씀드렸던 경제 사회분야에서의 전략이든 다른 전략이든, 우리하고 또 다른 전략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하고 설득하고 또 양보하고 타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국가를 제대로 운영해갈 수 있는 것이죠. 때로는 빨리, 때로는 느리게, 이렇게 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정치 측면에 있어서 그 부분이 우리가 앞으로 이뤄나가야 될 우리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한국에서 이뤄나가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될 수 있는데, 다만 이것은 몇 가지 실패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또 지금 국민이 느끼는 불만과 욕구를 직접 해결하는 수단과는 인과 관계가 너무 멀어 보입니다. 과정의 인과관계가 너무 멀어 보이죠.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인과 관계가 보이질 않죠. 직접 내가 아이 학비 마련하거나, 직접 돈을 버는 그런 일과 바로 연관돼 있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 다음에 참여정부에선 대통령 인상이, 투쟁하던 사람이라서 ‘저 사람 아닌 것 같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투쟁적 리더십을―어떻든 리더십이든 아니든―투쟁적인 지도자로 저는 그렇게 계속 비쳐져 왔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아무리 그 말을 해도 사람들이 실감이 안 나나 봐요. 그래서 이런 것은 지금 참여정부 안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함께 이론적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을 전부 통틀어서 얘기했을 때 우리가 상생의 정치, 상생의 경제, 상생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우리 사회의 상생의 어떤 가치, 이런 것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그래야 잘 살 수 있고, 그래야 더불어 함께 잘살 수 있고,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할 수 있지 않는가.

주로 경제 사회만 얘기했습니다만 한·미관계도 있고, 남북관계도 있고, 동북아시아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있고, 나아가서 세계 질서가 있습니다.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은 욕구의 문제, 충족의 단계와 그 다음 역사발전에 있어서의 전략적 과제들을 우리가 쭉 한번 일괄해서 펼쳐 놓고 본다면 그런 관점에서 투쟁의 시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투쟁의 시대와 개혁의 시대, 이제 그야말로 상생의 민주주의를 해 나가야 될 시대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5년 단임제, 대통령제, 그리고 임기 불일치,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가 따로 가는 제도…. 5년이라는 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5년이든 4년이든 3년이든 따로 가는 제도, 이 제도야말로 갈등을 통합하기가 가장 어려운 제도입니다. 규칙에 의해 결론이 나도 승복하기가 어려운 제도지요. 국민으로부터 국정 운영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우선하는 겁니까, 국회가 우선하는 것입니까? 정통성이 어디에 있죠? 대한민국 국가권력의 정통성이 국회에 있는 것입니까, 정부에 있는 것입니까? 물론 비상사태가 되면 대통령에게 그것이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헌법에는 그것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지만 비상사태라도 일일이 국회에 가서 다 물어봐야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론상으론 그렇습니다.

권력의 정통성이, 위임의 정통성이 어디 있느냐는 문제부터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아마 혼란스런 대목일 것입니다. 거기에다 이 두 개가 턱 갈라졌어요. 국회 다수당과 여당이 갈라져 있으니까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대의 정의가 지배해 왔던 ‘타도의 정의’ ‘반대의 정의’가 지배해 왔던 역사적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는 선이요, 찬성은 야합이다,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교수님들이 정부에 참여했다 돌아가려고 하면 ‘어용학자 물러가라’ 이런 정서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단 말이지요. 실무적 경험을 가지고 있고, 정말 귀중한 학문적 업적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돌아오시니까 저 선생님한테 우리가 그때 실제로 일해 봤던 경험이 무엇인지를 들어보자고 하는 학교, 이런 문화는 잘 없고 ‘당신, 정부에 갔다 왔지?’ 참여정부를 싫어하는 학생들은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가서 감투 달고 으쓱거렸지?’ 대개 이런 감투라고 하면 직위라는 것을 벼슬과 감투로 생각하고 ‘너 벼슬 한다고 으쓱거렸지, 재미 봤지?’ 이런 저항감들이 존재하고 있죠. 이런 환경 속에서 국회 내에 다수 연합이 만들어지기가 매우 어려운 이런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 하는 것이 이번 개헌안입니다.

‘확 뜯어고치지, 그러면’. 그렇지요. 항상 다수당이 아니면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제도가 있습니다. 확 뜯어고치지요. 그런데 그 얘기 꺼내면 정말 시끄러워집니다. 일이라는 게, 문을 열 때 한꺼번에 열두 대문 바깥에서 한꺼번에 쫙 동시에 열어서 안마당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귀찮지만 문을 하나씩 하나씩 열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목욕탕에 가서 한꺼번에 옷을 확 벗어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벗을 수가 없지요. 단추 하나씩 하나씩 풀어야 되는 거죠. 마찬가집니다. 지금 우리의 개헌안이라는 것은 첫 단추를 푸는 과정입니다. 첫 대문의 빗장을 여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 대문에 가서는 우리가 헌법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얘기를 하자. 지금은 적어도 가장 비효율적인 것만이라도 피하자. 그리고 그 다음 얘기를 해 볼 수 있는 빗장이라도 풀자. 이 두 개가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20년 만의 기회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헌법개정을 논의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 가장 최악의 상태는 그래도 좀 피해 보자. 최악의 상태를 피하기 위한 것이 임기일치라고 하는 내용적 조항에 들어 있는 것이고, 금년에 해야 된다는 것이 다음 토론의 장을 열어놓자, 가능성을 열어놓자 하는 것이 금년도에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헌법개정이라는 것이 역사에서 우리가 진보의 과정, 우리 한국 역사가 가야 될 진보의 방향을 멀리 내다보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기 위한 제도 하나를 우리가 풀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 작은 개혁의 과제이지만, 보기에 따라 결정적인 개혁의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정권의 정통성, 정부의 정통성이라는 것을 일치시키고 거기에서 실제 존재하고 있는 갈등 요소들을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제도 개선의 장이고, 또 다음 토론의 장을 열어 나가자는 것이지요.

그것이 헌법 개정의 제도가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개헌을 하는데 돼야 될 거 아니냐, 안 되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 그건 무엇이든 국민들의 합의를 얻어나갈 때는 안 될 때부터 출발해서 차근차근, 꾸준히, 의제를 공론화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지도록 조금씩 조금씩 한 발씩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국가보안법 하나만 해도 한 조항씩 한 조항씩 수십 년을 지금 다듬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마지막 꼭지를 우리가 따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축적되어 오는 논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헌법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 나간 다는 뜻이 하나 있고요.

두 번째는, 제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목표는, 우리 한국의 정치풍토를 개혁하자라고 하는 의제를 개헌안 안에 넣어놓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풍토 개혁에 대한 강력한 요구랄까요, 정치개혁의 요구입니다. 요구에 대한 의제를 이 안에 넣어놓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정치제도가 민주적으로 개혁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의 책임이라든지, 정확한 진실을 가지고 정치를 해야 된다든지, 자기의 소신과 신념에 근거해서 일관된 정치를 말해야 된다든지, 일관된 가치를 말해야 된다든지, 진실을 토대로 일관되게 가치를 얘기하고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 나가야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정치적 덕목.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건 전제주의든 민주주의든 어떤 제도 위에서도 정치는 불가능해 집니다.

진실을 토대로 하지 않는 정치는 어떤 제도로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말에 가치가 실리지 않고, 일관성이 실리지 않는 정치는 어떤 경우에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제도로도 이것은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보증해 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 사회를 가지고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좋은 헌법을 가지고 있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가능한 토양, 적어도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의 토양, 이 정치의 토양이 갖춰져야 되는데, 그 토양을 갖추자고 하는 제안입니다. 그것을 우습게 생각하는 정치문화에서 정치는 성공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행정수도 이전, 이미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됐던 것입니다. 일부 언론을 놓고 얘기한다면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이전에 극찬하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어떤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맹렬한 반대에 돌아서 가지고 반쪽을 내고 말았습니다. 작전통제권 역시 그들이 찬성했고 그들이 극찬했던 것이지요?

헌법개정 한번 보십시오. 헌법개정, 이것은 찬반의 갈등이 있었던 주제가 아닙니다. 대부분 찬성해서 ‘시기가 언제냐?’ 이 어려운 주제를 언제 할 것이냐의 문제에 관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언제 할 것이냐, 핵심적인 문제는 뭐냐, 바로 이것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임기 불일치, 또는 한 번 하고 그만 두니까 여러 가지로 레임덕이 빨리 오고, 정부가 힘 있게 일할 수 없다, 이런 거 아닙니까? 대개 거기에 중심이 두어져 있어서, 또 대통령 하고 싶은 사람들 욕심도 있었겠지요. 한번만 하는 거 보다는 두 번이 낫겠다고. 그렇게 공감대가 만들어져 있고, 모두들 하자고 하고, 국회 안에서 각 당이 연구해 만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더니 이제 선거에 영향을 미칠까 봐, 한마디로 말해서 한나라당이 이미 절반 먹었는데, 한나라당이 이미 정권을 거의 다 먹었는데 토해 내게 될까봐. 뭐 이게 무슨 토하는 약입니까? 아니거든요. 아무 관계 없어요. 그걸 가지고, 웬 겁을 그렇게 내 가지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도전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정치판 흔들리면 ‘우리 다 먹은 정권 놓친다’ 이거거든요. 그것 가지고 가는데, 전 언론이 거기 다 지지하고 비겁한 언론들은 또 따라 가고, 그렇지요? 기득권 언론들은 적극적으로 그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비겁한 언론은 따라 가고, 비겁한 시민단체는 침묵하고. 그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말아야지, 그것이 현명한 지도자 아니냐’ 제 선택이 그래야 합니까? ‘그러면 말아야지’ 이것이 지금 인터넷에 가면 ‘국민들이 싫다는데 자꾸 왜 하자고 해?’ 이거거든요. ‘왜 싫소?’ 물으면 대답이 없습니다. ‘왜 싫소?’ 물으면 ‘큰 당이 싫어하니까’ ‘안 될 거 같으니까’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가치 판단을 멈추어 버린 겁니다. 참 걱정입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가치판단을 멈춰 버린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들께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안 된다고 쉽게 포기하는 그런 사람이면 리더가 아니다. 앞에 설명을 장황하게 드렸는데, 이것은 우리가 거쳐 나아가야 될 역사적 과정입니다. 꼭 이 개헌을 안 하더라도, 다음 다른 어떤 헌법을 하든지, 아니면 이 헌법하에서라도 정치인들에게 책임 있는 정치적 태도를 요구하는 정치적 환경·풍토·문화라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하나, 옳은 것은 하나하나 만들어 가 보자.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 있냐? 궁극적으로 제가 앞으로 성공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대통령되는 데까지는 제가 그렇게 해서 성공했습니다. 내가 또박또박 하나하나 원칙대로 해 왔던 것 말고는 다른 아무런 재주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하는 작은 거짓말, ‘너 말 안 들으면 밤에 뱀이 와서 고추 물어.’ 이것도 거짓말 했다고 규탄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거짓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 거짓말 말고는 제가 거짓말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감히.

그래서 ‘이것도 역사를 축적해 가는 과정이다’ 생각하고 국민들 앞에 이것이 잘 공론화 되도록 여러분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다음 주엔 제가 중동 가야 됩니다. 오늘 시간이 다행히 이렇게 돼서 여러분들께 즉석 강연을 한번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이 시기에 만났다’라고, 그 인연으로 우리가 우리 한국의 미래를 그야말로 뭔가 내다볼 수 있는 그런 역사의 진보를 함께 좀 만들어 가십시다,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