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끝내 밝혀진다

강산21 2007. 2. 27. 14:39
 

역사는 기록의 산물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역사는 단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것만은 아니다. 기록에 게을리한 자들은 승리하고도 나중 패배자에게 흡수당하기도 한다. 몽고의 사례가 그것이다.

기록은 끈질긴 설득의 결과물이다. 당대에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가치를 내내 보존하고 관리해오면 결국 드러나는게 있는데 그렇게 하여 결과물이 후대에 인정받는다면 그건 역사가 된다.

한글 창제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누구나 한글창제의 위대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세종이 처음 한글 창제를 주창할 당시, 한글에 대한 거부감은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세종은 당시 세계 패권국가 중국의 문명(지금으로 치면 기초, 응용과학의 원천기술)을 조선 문명화 시켜 조선사회 전반에 반영시키는 게 국가발전 전략의 핵심으로 봤다. 그리하여 이런 목표하에 이를 가장 재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국민 통합적 서비스 원천 즉,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다고 여겼고 이를 “한글”의 개발로 본 것이다.

“나랏말쌈이 중국과 달라...”라는 훈민정음은 이렇게 탄생했다. 세종이 한글 창제에 주목한 건 일부 사대부의 기득권적 지식만으로는 조선의 성장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조선 경제 생산성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 손에 달려있는데 이들에게 기술과 혁신을 소통시킬 무기가 없다면 그 자체로 성장은 허무한 목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세종은 간파했다.

양반 사대부를 떠나 모든 백성이 자기의 뜻은 쉽고 빠르게 밝히는 시대여야만 비로소 사회내부의 잠재성장률이 상승하고 이를 토대로 문명국가 건설이라는 세종시대 목표가 도달된다고 세종은 생각했던 거다. 세종은 핵심을 제대로 찌른거다.

그러나 지식인 그룹 대부분은 이런 세종의 선도적 혁신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세종의 노력은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지식인 그룹의 격렬한 반대를 초래한다.

이로서 세종과 지식인 그룹간에 대대적인 이념 논쟁이 펼쳐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의 대담 내용이다

최만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한글창제에 반대한다..

첫째, 중국이 이 일(한글 창제)을 두고 조선의 시건방에 대해 벌하려 하면 어쩌나,

둘째, 중국문명이 우월한데 더 저속한 문자를 사용할 이유가 있나,

셋째, 27자 언문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면 누가 앞으로 공부하려 할 것인가,

넷째, 백성들이 억울함을 느끼는 건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형리 판단의 문제일뿐,

다섯째, 국정의 다른 일도 많은데 한갓 놀이 같은 일에 집중하는 이유는 뭔가..

여섯째, 이처럼 중차대한 판단을 동궁에 맡기고 서둘러 진행하려는 저의가 뭔가,

여기서 우리는 세종시대의 단면을 보게 된다. 상상해보자 만일 세종이 아니라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시대에 이런 반론이 공개석상에서 나왔디면 어찌되었겠는가? 우리의 경험적 가치로 판단했을 때 아마 최만리는 그 자리에서 목이 뎅겅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민주적인 대화와 토론으로 수렴하려 했다. 이점이 정말 놀라운 대목이다

세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첫째, 설총이 이두를 만든 것도 백성들이 말과 글이 달라 헤메는 것을 교정해 주기 위함 이였듯이 한글도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자 만든 시도인데 왜 이런 선의를 인정하지 못하는가...

둘째, 조선백성의 입모양과 구강구조를 연구하는 등 이참에 우리말의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현실에 맞는 우리글을 연구하는 행위가 바로 한글 창제인데 음운학 등에 지식이 없는 자들이 왜 이리 어설픈 반대를 하는가

셋째, 사람이 좋은 일을 행하고 안하고는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자질의 문제이기에 한글이 필요없다고들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는 선비정신을 훼손하는 어이없는 비평이 아닌가

넷째, 내가 책 읽기를 좋아하고 또한 집현전을 만들어 신하들과 국정대화와 지식교류를 하기 좋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한글 창제를 한갓 놀이쯤으로 비하하는 저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다섯째, 동궁(문종)에게 한글 창제의 과제를 일부 담당케하고 이를 독려하는 것은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신속히 이루어져야 하며 훗날 나 혼자만의 과제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이를 폄하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 코리아 다시생존의 기로에 서다에서 참조..)

위의 공방을 분석해보면 당시 지식인들은 주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중심으로 한글창제를 반대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념적인 요소가 강하고 원칙적이며 나머지 요소는 그런 논점을 좀더 합리화하기 위해 등장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서 세종은 중국과의 사대관계 청산을 한글 창제의 직접적인 목적으로 거론한 바 없다. 이를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다. 세종의 생각은 세계질서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질서에 편승하기 위해 내부의 혁신을 독려하자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요약하면 이렇다. 한글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한글 창제 이것은 “국가 이념을 흔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지만 세종의 시각에서는 “세계질서에 편승하고자 하는 혁신의 사례”로 귀결된다는 거다. 이 관점의 차이는 결국 후대의 역사의 판단에 의해 결론 나는데 누가 옳았는지는 결국 역사가 증명해주었다.

위의 토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세종 시대가 위대한 건 단지 위대한 결과물적인 사건 때문만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세종시대의 본질적 위대함은 일방적인 권력으로 자신의 통치를 집행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토론으로 합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역사적 사실로 보존했다는 점이라고 본다. 이건 참으로 놀라운 인내심과 더불어 그 끈질긴 실천력의 결과물이라고 해야 한다.

수천년 우리 역사로 볼 때, 지도자가 지식인 그룹과 책임감 있는 대화를 요청했던 적은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 이는 권력의 속성상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대화에서 빠지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을 찾아볼 것인지 암담하다. 저들은 애써 갖게된 대화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노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단박에 나타날 결과물이라고 본다. 또한 10년만 지나보면 그 효과는 가중될 것이고 50년이 지나면 하나의 사례로 규정화 되며 100년이 지나면 역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 5년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끈질긴 설득의 실천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 옳았는지는 결국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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