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정의

지계표와 희년: 토지 평균 분배

강산21 2006. 10. 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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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계표와 희년: 토지 평균 분배

- 구약 오경의 토지제도 (2) -


박창수


출처: <뉴스앤조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실 때, 제비를 뽑아 지파별·가족별로 그 수를 따라 수가 많으면 그만큼 많은 토지를, 수가 적으면 그만큼 적은 토지를, 분배해 주셨다(민 33:54). 이것은 토지의 ‘1인당 균등 분배’, 즉 토지의 ‘평균 분배’였다.


바로 이렇게 평균 분배된 토지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토지 관련 명령들이 주어졌다.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명령을 주시고,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시고, 다만 토지 사용권을 다음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리고 토지 사용권을 팔았을 경우, 희년 전이라도 근족(近族)의 도움으로 혹은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토지를 무를 수 있게 하셨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최후에는 도래하는 희년에 토지권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평균 분배된 토지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하에서는 지계표와 희년에 대해 상술하고자 한다. 


지계표는 개인의 토지 소유권의 상징이 아닌 하나님의 토지 주권의 상징


지계표는(地界標, landmark)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나무로써, ‘땅을 쓰는 평등한 권리를 겉으로 보이게 표시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토지 사유제 관습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피상적인 오해처럼 지계표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상징이 결코 아니었다. 지계표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상징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토지의 영구 매매를 허용하는 현대의 토지 사유제와 달리, 구약 율법의 토지 제도에서는 토지의 영구 매매가 금지되었다. 오직 토지 사용권의 매매만 허용되었으며, 그것도 다음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를 판 사람이 나중에 다시 와서 되살려고 하더라도 토지를 산 사람이 팔지 않겠다고 하면 토지를 판 사람이 결코 되살 수 없는 '지주 우선의 원칙'이 관철되는 현대의 토지 사유제와 다르다. 구약 율법 토지 제도에서는 다음 희년이 오기 전이라도 토지 사용권을 판 사람 본인이나 그 근족이 와서 토지 사용권을 다시 사겠다고 하면 반드시 되팔아야 했다.


지계표는 개인의 토지소유권을 상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땅을 분배해 주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곧 지계표는 하나님이 땅의 주(主)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거룩한 상징인 것이다.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저주 받을 중대 범죄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저주 받을 죄악으로 선포되었다.(신 27:17)


"온 백성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위에서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모였다. 오늘날의 신문이 쓰는 언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레위 사람들이 이 대중 집회에서 일련의 결의를 제의하였고,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그러한 결의 속에서 지계표를 옮기는 짓은 - 평등한 토지 사용권을 침해하는 것은 - 민족에 대한 저주를 초래하는 사회적 죄악,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가정 파괴 범죄, 우상숭배․간음․근친상간과 같은 부류의 죄악,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게 하는 것, 배신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 자객을 고용하는 것과 같은 부류의 범죄와 동일한 정도로 중한 범죄로 간주되었다."(<하나님의 토지법>,Frederick Verinder, 이풍 역, CUP, 1996년, 61~62쪽)


지계표를 옮기는 것이 저주받을 중대 범죄로 간주된 이유는 첫째, 하나님이 땅의 주(主)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거룩한 상징이기에 그 지계표를 옮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토지 주권을 정면으로 배척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토지는 인간의 생활의 터전이고 생존의 기초이며 생산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에 이웃이 정당하게 기업으로 받은 토지를 탐내어 이웃의 토지를 빼앗는 것은 곧 이웃의 생존권과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와 노숙자로 전락시킨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율법이 의도한 사회 체제를 붕괴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는 잘 적시하였다.


“우리들의 경계든, 우리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경계든, 경계를 옮기는 것이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영원히 존속되라고 하나님께서 몸소 만드신 성스럽고 확고한 권리의 한계를 과거에도 표시하였고 지금도 표시하고 있는 그 지계표를 없애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경계를 넘어가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 행위가 전쟁과 폭동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경계를 옮기는 사람들은 율법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하나님의 토지법>, Frederick Verinder, 이풍 역,CUP년, 1996년, 65~66쪽에서 재인용)


희년법의 입법 목적


노동이 토지와 분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율법 하에서는 가난이 심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은 법이다.(잠 12:11, 28:19)


"율법이 준수되는 한, 어떠한 히브리 사람도 형제 히브리 사람에게 착취 임금을 받으며 고역을 할 필요가 없었다. 히브리 사람은 땅을 평등하게 사용할 권리를 그에게 보장하고 있는 율법의 보호를 받기만 하면, 자신의 노동에 의하여 남에게 신세를 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도 않으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율법이 시행되었을 적에 노동자는 그의 생산물 전부를 그의 임금으로 가졌다. 노동자는 그가 생산한 것을 지주나 노동 착취자와 억지로 나눌 필요가 없었다."(<하나님의 토지법>, Frederick Verinder, 이풍 역, CUP, 1996년, 72쪽)


그런데 사고와 재난·게으름과 강탈 등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가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율법은 처음부터 공평한 출발이 이루어지도록 규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평한 상태가 지속되도록 규정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땅이 없는 무산 노동자라는 개념은 모세 율법에 담긴 정의라는 개념과는 너무나 상반되어서 각 세대에 한 번씩 자연을 이용하면서 노동을 할 평등한 권리가, 처음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보장하는 특별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희년이라는 제도가 수립되었다."(<하나님의 토지법>, Frederick Verinder, 이풍 역, CUP, 1996년, 73~74쪽)


양의 뿔로 만든 나팔 소리가 희년을 선포하면 토지는 그 토지를 기업으로 받은 사람의 가족에게 되돌아왔고 그의 자녀들은 '평등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율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커다란 땅을 소유하는 부유한 지주 계급이 성장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땅이 없는 극빈자 계급의 수도 늘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근면의 정도가 다름에 따라서 생기는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었지만, 그리고 그러한 불평등이 자연히 나타났을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극심한 빈곤과 부요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하나님의 토지법>, Frederick Verinder, 이풍 역, CUP, 1996년, 78쪽)


<희년법은 우리 시대에 구현하려고 하면 안 된다?>

희년의 주기가 49년인지 아니면 50년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49년 혹은 50년째 되는 희년의 속죄일이 도래하면,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어서 가난 때문에 부잣집에서 품꾼살이하던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를 회복한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회복하고, 가난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생이별을 해야 했던 ‘가족’을 회복하게 된다. 한 마디로 희년은 자유와 토지와 가족을 회복하는 해인 것이다.


국내 신학계를 비롯하여 일부 논자들이 구약시대에 희년이 준수되지 않았다고 잘못 추정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배경은 희년의 토지회복법에 대해 지주가 자기 물질적 손해를 무릅쓰고 빈자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는 법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년의 토지회복법은 '토지에 대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에 대한 법이 아니라, '부자와 빈자 양쪽 모두 손해 없는, 토지사용권 계약 기간의 공정한 만료에 따라 빈자가 토지를 회복하는 법'이다. 희년의 토지회복법은 ‘부자의 땅 중에서 자기 가문이 기업으로 받은 땅을 초과하는 땅을 무상으로 몰수하여 빈자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법’이 아니다. ‘토지사용권을 도래하는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매매하는 율법 하에서, 희년의 도래에 따른 계약 기간의 만료에 따라 토지사용권을 산 자가 그것을 판 자에게 당연히 토지를! 돌려주어야 하는 법’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오경의 토지 거래 제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먼저 토지를 영구 매매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레 25:23) 그런데 토지 사용권을 도래하는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매매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레 25:15)


만약 땅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규례(레 27:16~25)에서 제시된 대로, 보리 한 호멜지기 밭(한 호멜의 보리씨를 뿌릴 만한 넓이의 밭)에 대해, 희년부터 다음 희년까지 곧 49년 혹은 50년 기간의 가격인 은 50세겔, 곧 한 해로 환산하면 1년에 약 1세겔을 구약 시대 토지사용권 매매의 표준가격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컨대 만약 도래하는 다음 희년까지 5년이 남았다면, 보리 한 호멜지기 밭의 도래하는 희년까지 5년 동안의 한시적인 토지사용권 매매 가격은 1세겔*5년=5세겔이 된다.


그리고 희년이 가까워질수록 그 가격은 하락하게 되는데, 도래하는 희년까지 4년이 남았으면 4세겔, 1년이 남았으면 1세겔이 되고, 희년이 도래하면 0세겔이 되는 것이다. 한편 토지사용권을 산 사람은 토지사용권을 보유하고 있는 기간 동안, 아마도 자기가 지불한 토지사용권 매입 가격 정도의 수익 혹은 그 이상의 수익을 그 토지로부터 거두었을 것이다. 즉 희년에 토지를 돌려줄 때,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희년의 토지회복법에 대해, 지주가 자기 물질적 손해를 무릅쓰고 빈자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는 법으로 오해하여 구약시대에 희년이 준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희년이 준수되지 않았다고 잘못 추정하는 일부 논자는 명시적으로 “희년이 준수되었다”라는 구절이 구약 성경에 등장해야만 구약 시대의 희년 준수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이다.


만약 희년의 토지회복법이 준수되지 않았다면, 즉 희년이 도래하여 마땅히 토지를 돌려주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오래지 않아 토지의 지파 가족별 평균 분배 상태는 무너졌을 것이고, 토지를 빼앗긴 빈자들 중 저항하는 자들은 살해당하였을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 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초기에는 품꾼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자기 세대를 넘어 그 자손 세대까지 계속해서 토지를 회복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영원한 품꾼’, 곧 노예 상태로 전락했을 것이다. 요컨대 구약시대에 희년이 한 번도 준수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곧 구약 시대 모든 기간 동안 지파 가족별 토지 평균분배 상태가 붕괴되고 토지를 잃은 빈자들이 살해당하거나 노예화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아합 시대 전까지 약 700년 동안 이러한 참상이 발생하였다는 기록이 구약 성경 안에 없다. 오히려 지파 가족별 토지 평균 분배 상태가 유지되었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이 구약 성경 안에 있다. 사사기의 베냐민 전쟁 직후, “각자가 유산으로 얻은 땅으로 돌아갔다”(삿 21:24)는 구절은 2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도 토지권이 상실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즉 희년은 계속 선포되고 시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열왕기상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나봇이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왕인 아합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은 토지의 지파 가족별 평균 분배 상태의 보존을 위한 것이다. 빈자가 토지를 팔더라도 영구히 팔지는 못하고 오직 도래하는 희년까지만 그 사용권을 한시적으로 팔고 희년이 도래하면 계약 기간 종료에 따라 토지를 당연히 회복한다. 곧 희년의 토지회복법과 한 묶음으로 주신 법이었다. 요컨대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 ‘토지사용권의 도래하는 희년까지의 한시적 매매 허용법’, ‘희년의 토지회복법’은 히브리 토지법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만약 700년이 지나도록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과 희년의 토지회복법이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면, 이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혀졌거나 아니면 사문화된 법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그 당시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만약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과 희년의 토지회복법이 아합 시대까지 700년 동안 시행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혀졌거나 아니면 사문화된 법으로 존재했다면, 어떻게 나봇이 감히 ‘잊혀졌거나 사문화된 법’을 들어 왕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나봇은 예외적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의인, 곧 율법을 잘 알고 또 준수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면, 아합은 어떤가? 만약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과 희년의 토지회복법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행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잊혀졌거나 사문 퓸駭摸 어떻게 왕인 아합은 나봇이 제기한 ‘잊혀졌거나 사문화된 법’에 대해 일단 한마디도 더 못하고 의기소침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나봇과 아합의 발언과 태도는 700년이 지난 그 당대에까지도 토지 영구 매매 금지법과 희년의 토지회복법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은, 잘 알려진, 법이었고 또한 왕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결코 사문화되지 않은, 관습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법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희년이 700년 동안 단 한 번도 준수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인 것이다.


구약 시대에 희년법은 단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희년법은 구약시대에 단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비현실적인 이상법이기 때문에 희년법을 우리 시대에 현대적으로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백보양보해서 설령 희년법이 단 한 번도 구약 시대에 실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희년법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희년법을 준수했든지, 준수하지 않았든지, 관계없이 희년법의 원리를 구약 시대 상황과는 다른 현대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