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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무린다 마음까지

강산21 2005. 12. 7. 11:48
버무린다 마음까지
나눔의 김장 담그기
 

▲ ‘하늘땅별땅’ 가족들이 군포시 속달동 수리산 자락 공동 텃밭에서 뽑은 배추를 다듬고 있다.

지난달 26일 오후 1시께. 군포시 속달동 수리산 자락의 한 배추밭. 어린 자녀를 앞세운 가족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공동 경작하는 밭에 키운 배추로 김장을 해 어려운 이웃과 나누려는 군포기독청년회(YMCA) 생협 동아리 ‘하늘땅별땅’ 회원들이었다. 열세 가족으로 이뤄진 이 모임의 김장 나누기는 올해로 3년째다. 지난 9월 함께 배추 모종을 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이날부터 1박2일 동안 진행된 이 김장 나누기에 김정수 기자가 가족과 함께 참여했다.

 

# 13:30 수리산 자락의 한 배추밭

“아빠 때문이야”…터진 울음보

 

전날 야근을 핑계로 점심 때까지 이불 속에서 미적댔다. 결국 아내와 두 아들까지 약속에 늦었다. 서둘러 가보니 200여평 남짓한 밭의 배추는 모두 뽑혀 있었다. 신나는 놀잇감을 만난 듯 달려든 어린이들과 인근 안양외고와 명지전문대 학생 자원봉사자 8명 덕분에 어른들은 나설 틈도 없이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밭 가에 쌓인 배추를 본 둘째 남규(3)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듯 하더니 “으왕~”하고 울음이 터져나왔다. 며칠 전부터 배추 뽑는 날을 기다려 온 남규였다. 녀석을 달래기 위해 자원봉사를 나온 형과 누나들은 배추 몇 포기를 몰래 다시 심고는 뽑게 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뽑은 배추는 700포기가 넘었지만, 시장에서 팔리는 크기로 치면 200포기 분량도 안 돼 보였다. 농삿일에 서툰 사람들이 “땅을 죽이지 말자”며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까지 안 쓰는 바람에 제대로 자라지 않은 것이다. 하늘땅별땅 가족들은 인근 최선희(73·군포시 속달동) 할머니 배추밭에서 50포기를 사 보태기로 했다. 하늘땅별땅 가족들이 주말마다 오가는 모습을 지켜봐 왔던 최 할머니는 10여포기를 더 뽑아가게 했다.


# 22:30 군포시 가야복지관 뒷마당

“배추가 모자라, 배추가…”

 

밭에서 흙 묻은 뿌리만 대충 도려낸 배추를 싣고 간 곳은 군포와이엠시에이가 위탁 운영하는 군포시 수리동의 가야종합사회복지관 뒷마당. 김장 재료 나르기와 무 다듬기를 도운 학생들이 돌아간 뒷마당에는 하늘땅별땅 가족 10여명만 남았다. 뚝 떨어진 기온에 어깨를 움츠린채 무 껍질을 긁고 있는데, 배추를 절이고 있던 쪽에서 “그래도 적은 것 같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임 회장 신동철(38·군포시 오금동)씨였다. 그러고보니 겉 잎을 뜯어내고 반씩 갈라 소금물에 절인 배추는 양이 반 가까이 줄어 보였다.

 

별도로 회비를 걷어 100포기를 더 사기로 했다. 밤 10시20분께 배추와 함께 도착한 회장 신씨와 총무 조은영(35·군포시 산본동) 주부가 “산본시장 아저씨가 ‘좋은 일 한다’며 덤으로 20포기나 줬다”고 보고하자, “그 아저씨는 왜 우리를 고생시키려 한다더냐”, “왜 다 받아왔느냐”하는 ‘즐거운 성토’가 이어졌다. 새로 온 배추까지 모두 절이자 11시반이 넘었다. 쪽파를 다듬고 마늘을 까는 등 양념 준비를 끝내자 200여개가 넘는 무를 채써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협동아리 ‘하늘땅별땅’ 가족들
공동경작 밭에서 배추 키워
1박2일 세상사는 맛 무친다

 

# 03:00 가야복지관 지하 식당

무 채를 써는지, 무 젓가락을 써는지

 

쏟아지는 졸음을 주부 회원들의 수다로 쫓으며 새벽 3시까지 식당 바닥에 앉아 채를 썰었다. 손가락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어른 장딴지 만한 단단한 무를 일정한 두께로 써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두 시간 이상 반복하다보니 “관규 아빠가 써는 건 채가 아니라 젓가락”이라는 엄마 회원들의 ‘놀림’은 듣지 않을 정도가 됐는데, 평소 취약한 허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힘들어 하는 아내를 남겨둔 채 식당을 나서면서 시골에 계신 노모를 생각했다. 대가족을 먹이느라 수십년 동안 배추만 100포기 이상씩 김장을 했고, 지금도 김장을 해 자식들에게 보내는 어머니였다. 내년 김장 때는 휴가를 내서라도 가서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생전 처음 김장에 참여해 얻는 가장 큰 소득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군포 가야종합사회복지관 지하 식당에서 김장을 담는 ‘하늘땅별땅’ 가족들.

이튿날 아침 7시께. 복지관 뒷마당에 나가니 몇몇 아빠들이 전날 절인 배추를 헹구고 있었다. 소쿠리에 받쳐 둔 양을 보니 시작한지 꽤 된 듯 했다. “4시반부터 시작하려 했는데 1시간이나 늦었다”는 설명이었다. 배달하고 뒷정리 할 시간까지 감안하면 서둘러야 했다.

 

아침을 먹고 지하 식당에서 잠시 쉬는데 배추에 양념속을 채우던 주부들이 배추를 더 갖다 달라고 했다. 헹군 배추 한 소쿠리는 혼자서 들기도 어려웠다. 다른 아빠와 맞들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갈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가 삐걱거리는 듯 했다. ‘다른 일이 없을까’하고 식당에서 머뭇거리는데 한 주부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었다. 손질이 덜 된 배추뿌리들을 도려내달라는 것이었다. ‘살았구나’ 하면서 바닥에 주저 앉아 ‘정성껏’ 배추뿌리를 도려냈다. 기자의 손놀림을 지켜보던 주부들이 “관규 아빠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며 속도가 느린 것을 슬쩍 비꼬았다. 그래도 좋았다.

 

# 15:00 복지관 옆 영구임대아파트

“올해는 배추값도 비싸다던데…”

 

마지막 단계인 배추 속 채우기 속도도 느렸다. 이 공정을 맡은 주부들 가운데 아내를 포함해 올해 모임에 들어온 네 가족의 주부가 모두 ‘왕초보’였기 때문이다. 정혜란(36·군포시 산본동)씨는 “친정과 시댁에서 얻어 먹기만 해서 몰랐는데 직접 해보니까 김장은 온 가족이 함께해야 하는 큰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장을 6㎏ 가량씩 비닐봉지에 나눠 담는 일까지 끝난 것은 오후 2시께였다.

 

어려운 이웃 50집에 김장을 배달하는 일은 산본 수리고 자원봉사 학생 5명이 맡아주었다. 이들과 김장봉지를 담은 플래스틱 통을 맞들고 나섰다. 복지관 근처 영구임대아파트의 노인들은 김장봉지를 건네자 “올핸 배추도 비싸다던데…”라고 하며 고맙게 받아주었다.

 

하늘땅별땅 가족들의 1박2일 김장 나누기는 아이들이 자고 뛰어놀면서 어지른 복지관 청소를 끝내고 27일 저녁 6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어두운 복지관 앞 길을 빠져나가는 가족들의 승용차 트렁크에는 ‘사랑으로 버무린 김장 한 자루’에, ‘나누며 사는 삶의 보람 한 자루’씩이 덤으로 실려 있었다.

군포/글·사진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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