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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선생님의 웃음

강산21 2001. 3. 3. 00:26
경비아저씨 토니의 크리스마스이브새벽에겪은한일화
하선생님의 웃음


졸업 후 가진 첫 직장이 청소년 수련원이었다. 그곳에서 난 정말 아름다운 웃음을 가진 분을 만났다.수련원의 발전소 전기를 담당하시는 하선호 선생님. 바가지 모양의 머리, 양말이 다 보일 정도로 긴 바지를 올려입으신 모습, 약간씩 더듬는 어눌한말투... 적어도 수련원에서 그런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히 얼굴에 담는 웃음을 보면 삶을 자동차애비유한다면 그는 20∼30킬로미터를 일정하게 서행하는 파란 자동차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분이다.

얼마 전 우리팀끼리 가졌던저녁 회식자리에서 한참동안 하선생님 이야기가 오고간 적이 있다. 기숙사 주변을 배회(?)하며 알도 낳고 기상나팔도 불어주는 닭들은 모두하선생님이 병아리 때부터 길러왔다는 것, 음향실에 하선생님이 계시면 그 큰 대강당에도 사회자는 마이크와 음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야외전기공사를 나가실 때면 늘 뭔가 쓸만한 것을 주워오시는 분이라는 것... 그 작은 키에 공사장용 철근 폐자재를 질질 끌고 오셨을 그분... 귀뒤엔 언제나 연필 하나가 꽂혀 있고 콧노래로 언제나 흥겨운 그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도예를 담당했던 내가 며칠후부터 쓰게 될 토련기(흙뽑는 기계)에 전기설치를 부탁드린 적이 있다. 며칠이 지난 후 가보니 전기도 되어 있었고 감전을 방지하도록 배려도해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흙이 나오질 않는 거였다. 하선생님께 여쭈어보니 작동이 잘 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마른 흙을 몇덩이 넣었다고 하셨다.적당히 물기가 있도록 반죽된 흙을 넣어야 하는 기계였는데... "이렇게 딱딱한 흙을 넣으시면 어떡해요. 스크류가 손상되었으면 어쩌시려구요!"전기 설치로 고생하셨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푸념 섞인 넋두리를 하고 말았다. "내가 잘 모르고 그냥 잘되나 보려고 넣어봤네요. 이거 미안해서어쩌죠? 제가 뜯어서 한 번 보죠 뭐." 머리를 긁적거리시면서 공구함에서 공구들을 주욱 꺼내셨는데 그때도 웃고 계셨는지는 보지 못했다. 괜한생떼에 머쓱해진 나는 죄송한 마음에, 들고 있던 육각렌지로 열심히 나사 푸는 일만 계속 했다. 조심스럽게 모든 나사를 다시 조이고 나서야 "자기기계는 자기가 그때그때 고쳐가면서 쓸 줄도 알아야 돼요." 그러면서 전압, 벨트, 물사용, 압축순서 등에 대해 주욱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런분이 옆에 있다는 것이 든든해지고 그 때 해주신 말씀은 내내 귀에 맴돌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어느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불이 모두 나갔다. 정전된 곳은 사무실 뿐만 아니라 복도, 로비, 가로등... 수련원전체였다. 문제는 아이들이 취침준비를 하는 숙박동이었다. 안정을 알리는 방송을 하고 나서도 시간이 흘렀지만 불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때 하선생님은 어디 계신 거야?' 여기저기 찾다가 지하층에 있는 전기실로 내려가 보았다. 굉음을 내며 웅웅대는 자가발전기의 힘겨운 노력이계속되었고 불빛 하나가 그 옆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선생님?" 내가 말끝을 닫기 전에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하나 둘 건물마다 불이들어오고 어두웠던 그곳도 환해졌다. 그분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이쪽으로 걸어오시면서도 활짝 웃고 계셨다. 그제서야 책임감이라는 말 뜻을알 것 같았다. 내가 뭘 해야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그분은 이미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몫을 하고 계셨던 거다.

전기뿐 아니라 밤하늘 별자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아시는 따뜻한 분.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고, 낭만적인 그분의 웃음이 직장을 떠나온 지금도 자꾸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따뜻한 세상만들기>는 작으나마마음을 나누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든 방입니다. 따뜻한 글을 싣고서로 좋은 글을 공유하며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이제 시작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열린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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