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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정, 노무현의 비극적 사랑법 - 유시춘

강산21 2005. 7. 19. 09:48
연정, 노무현의 비극적 사랑법
입력 :2005-07-14 16:11   유시춘 작가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제의를 두고 말이 무성하다.

계산법도 모두 다르고 실현가능성은 더욱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 대표가 아무 고뇌의 흔적도 없이 불쑥 박근혜대표에게 총리운운하는데에 이르러서는 선남선녀의 상식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 같다.

미시적인 여러 정치공학적 접근과 분석은 전문가들의 몫일 터이니 필자는 노무현대통령이 우리 사회를 향해 부단히 던지고 있는 화두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정치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여러 가난한 국가들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함께 성취한 대한민국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는데도 대통령인 그가 왜 권력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지지자와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지.

‘연정’제안은 제왕적 대통령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왜 천신만고끝에 ‘탄핵’의 험준한 봉우리를 넘어서면서까지 지킨 국가운영권을 나누어 가지겠다는 것인가. 노무현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과거 어느때보다 어리둥절하고 피곤하다.

그가 집착하는 테제는 무엇인가?

그가 집요하게 매달리는 테제를 성취하는데 있어서의 객관적 현실여건은 어떤가. 대통령의 주관적 가치와 이를 실현하는데 필수적인 정치환경의 사이를 가늠해 보자.

아시아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사이의 태평양보다 멀고 아스라한 거리가 존재한다.

개발독재와 학살집단의 적자인 한나라당은 그저 입만 열면 ‘경제는 팽개치고 정쟁만 부추긴다’고 앵무새처럼 되뇌고 여당안의 다수자들조차도 ‘민생 어려운데 정치개혁 추진하면 표떨어진다’며 개혁입법에 미온적이다.

게다가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지역주의 덫에서 자유롭지 않다.

세상에 어느 국가원수가 ‘민생’을 챙기지 않겠는가. 자고새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는 첫 번째 문제는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일 것임은 기본상식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경제력 규모 10위권의 국가이다. 양극화의 질병을 치유해야하는 중대사가 가로놓여 있긴 하지만 굶주리고 헐벗는 국민은 이제 없다. 빈곤계층의 최저생계비는 국가가 부담할 수준이 되었다.

노무현이 추구하는 것은 가치를 실현하는 정치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가치는 국민을 정치적 문맹상태로 몰아넣는 지역주의 덫을 걷어내는 일이다. 최소한의 합리성과 토론이 거처할 수 있는 정상적인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 영남의 한나라당, 호남의 민주당 의원이 선량이라고 자부심 갖는 건 좀 웃기는 처사이다. 오징어로 노동자 면상을 후려갈겨도, 맥주병깨뜨리고 난투극을 벌여도 ET같은 외계인이 아니라면 부지깽이도 국회의원이 된다.

21세기 선진 후기산업사회 대한민국과 천연덕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원시성이다.

이 비열한 지역주의를 박정희가 선동하고 3김이 고착화시켰다는 진단 따위는 쓸모없는 분석이다.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에 비견해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가 옹호되던 시대도 이미 지나가버렸다.

극우적 절름발이 세계관이 국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원천은 지역패권이라는 습지이다. 이제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만이 삶의 알파요 오메가인 후진국민이 아니다.

IT최강국,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반도체산업이 주력업종이 된 사회의 구성원들이 봉건왕조시대의 정치의식과 극우적인 편향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너무 기형적이다.

노무현의 출현은 바로 이 기형과 불균형을 향한 저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산정으로 끝없이 바윗덩이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그는 비극적이다. 처음엔 홀로 시작했지만 원군이 불어났고 그의 진정성을 믿는 지지자들이 참여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는 아직 집요하다. 기어코 지역주의 정당이라는 ‘21세기에 기생하는 원시성’을 척결하려 들고 있다. 종로구를 버리고 적의가 번득이는 부산으로 내려갈 때처럼 미세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그가 꿈꾸는 풍경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지.

히틀러 패망 이후에 독일국민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국민이 지역패권이라는 올가미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합리적인 의식을 소유하게 되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사회!

가령,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홀로코스트 영화, 끔찍하지만 인간의 야만성을 정직하게 고통스럽게 보여준 ‘쉰들러 리스트’를 정부가 전국 청소년들에게 권장한 독일의 경우 등.

이 정도의 정치적 성숙은 우리국민의 교육수준이나 적극성으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실현가능한 가치라고 그는 판단하는 것같다.

절대악 전두환정권 시절에는 비정상적인 정치행위가 우리정치의 장에 횡행했다. 집단성명, 농성, 시위, 단식, 분신 등인데 이제 모든 표현의 자유는 무제한으로 열려있다.

때문에 현재 정치지형의 폐단과 모순 역시 토론과 대화의 장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다. 현재의 정치지형을 생산하고 있는 ‘투표율과 의석비율의 현저한 차이’나 표의 등가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행선거제도는 선량들이 제 밥그릇챙기는 이기심만 잠시 벗어나면 ‘열린 토론’이 가능하다. 지역대표가 아닌 국민의 대표성을 확실히 하고 표의 등가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도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아직 주판알을 굴리고 있어 알 수 없지만 홍준표 등이 ‘이상한 짓’으로 서둘러 단정하는 것으로 미루어 노무현의 의지를 단순한 정략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다. 21세기 한국이 내장해야하는 이 최소한의 합리성은 정녕 노무현의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한 것인가. 아직은 그렇게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뤼시앙 골드만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한 유형을 ‘비극적 세계관’이라는 워딩으로 개념화했다.

자아의 진실과 세상의 허위가 극한적으로 충돌할 때 지식인은 대체로 세가지의 유형으로 처세를 선택한다.

첫째는 부패타락한 세상을 등지고 세상 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로 파묻히는 것이다. 당쟁에 떠밀려 낙향하거나 유배된 왕조시대의 선비들이 ‘음풍농월’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최루탄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반독재 함성의 대학교정에서 ‘야한 여자’ 예찬론을 편 마광수교수나 일제침탈이 극에 달한 식민통치 아래서 자연과 불교의 선적인 세계에 귀의한 청록파등도 그렇다. 물론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 없지만 지식인의 책무에 충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둘째는 진실이 승리하는 세상을 위해 현실 속에서 행동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모순과 적폐가 극심한 사회에 이러한 경우는 허다하다. 현대사의 비근한 예로 우리가 베트콩이라며 비하적 표현으로 일관했던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이나 본 회퍼와 같은 신학자, 안중근 등 죽음을 불사한 열사들이 그렇다. 을사조약 이후 자결한 민영환이나 굶어죽은 최익현 등도 이에 해당한다.

셋째로 뤼시앙 골드만이 정리한 ‘비극적 세계관’이 존재한다. 진실의 관점에서 파시즘이나 독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만 현실적으로 볼때 이 타락한 위선적 세상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진실과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역설적 상황에 부딪친다.

이 때 진실에의 부정과 타락한 현실에의 긍정을 위험하게 오가게 된다. 세상이라는 부정한 현실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과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뤼시앙 골드만은 17세기 프랑스 정치사회사에 이 분석을 들이댔다. 김우창교수는 이 '비극적 세계관‘으로 일제치하의 한용운의 지적 활동을 해석했다. 청년기의 동학운동 가담이 좌절된 이후 만해는 시와 불경해석에 매달린다.

유명한 ‘님의 침묵’에 반복되는 ‘님’은 누구인가. 연애시의 외형에 담겨있는 만해의 ‘사상시’는 님은 떠났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음을 절규한다.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이 계속되면서 그의 님에 대한 사랑은 고질병처럼 깊어간다. 확실한 것은 ‘님’이 부재하지만 죽는 날까지 ‘님’을 사랑하는 연가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만해의 ‘님’은 애인, 조국, 해방, 해탈, 진리등을 모두 총합한 그 무엇이다.

뤼시앙 골드만의 ‘비극적 세계관’으로 노무현을 볼 수 있다.

그는 지역주의가 재생산하는 여러 폐해를 기어코 청산하고자 한다. 그는 기득권과 이기심의 종합세트인 ‘조선’으로 상징되는 세력과 타협을 거부한다.

이런 노무현의 꿈을 이해한다면 우리당 의원님들이 조선을 제 발로 찾아가고 긴 인터뷰를 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홈피에 올려놓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버리겠다고 한다. 정말 무서운 건 차지하겠다는 욕망이 아니라 버리겠다는 비움의 자세이다.

포로된 베트콩들이 총살당하기 직전에 ‘내 한 목숨을 버리지만 이후에 몇 백으로 거듭날 것이다’라는 단호한 유언 앞에서 침략자들은 기가 꺽였다 한다.

노무현의 사랑법은 비극적이다. 자신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더라도 꿈과 사랑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는 만해 말년의 시 ‘나의 길’을 닮아 있다.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노무현 그에게는 지역주의 정당과 그것이 파생시키는 온갖 적폐가 만해에게 있어서 식민통치만큼 치욕적인가 보다.

그의 비극적 사랑법이 광야의 외침처럼 공허하게 끝날지 사회적 대협약의 성공으로 나아갈지 그것은 단순히 대통령 노무현의 꿈의 실현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의 성격을 전환하는 일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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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졸리뽐므야~뽀롱뽀롱]  글쓴이: 졸리뽐므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