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냐 살인방조냐 - 안락사 허용을 둘러싼 논쟁
대한의사협회가 2001년 11월 '임종한자에 대한 연명치료 중단'을 밝힌 데 이어, 보험심사평가원에서는 회복불가능 환자의 진료비 지급을 거부했다. 이런 일들은 '안락사 논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말기환자의 '의미없는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말기 암환자에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항암주사가 효과적인 치료법인가, 오히려 통증억제와 요양이 환자에게 더 효과적인 진료는 아닐까"하는 것은 암환자 가족이라면누구나 되뇌이는 고민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는 형법상 촉탁살인죄나 자살방조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소생 가능성이 없는 식물상태 환자의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는 존엄사의 경우, 실제로 병원 등지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고 실정법으로 처벌하는 경우도 드문 상황이다.
죽음은 신의 의지에 달렸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죽을 수 있는 권리까지 인정되면서 죽음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1980년대에 본격화된 연구가 급기야 '죽음학'을 탄생시켰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삶의 한 연장선으로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죽을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다루는 최근 동향이나 죽음에 대한 이미지의 보편화로, 죽는다는 것은 이제 기피대상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친숙한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신이나 장기의 사후기증이나 유서쓰기 운동이 확산되고, 자살 등 구체적 문제까지 다루는 죽음학의 등장으로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확실한 사실 앞에 겸손해지고 아름답게 죽는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고싶어 한다. 노년에 이른 사람들에게 '고통없는 죽음'은 축복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그 '고통없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자연사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연장을 가능케 한 의학의 진보는 거꾸로 생명의 끝도 가능케 함으로써, 고통없는 죽음에 대한 통념을 뒤바꾸고 있다. 고통 앞에 무기력하기만 한 인간들이 의술을 빌려 '편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죽을 권리'와 '살릴 의무'의 끝없는 충동을 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바로 안락사 논쟁이다.
죽을 권리 - 안락사 논쟁
벨기에 하원은 2002년 5월 16일 말기 환자에게 제한된 조건하에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안락사 법안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승인했다. 법안은 법적인 성인 연령인 18세에 이른 환자들에 대해 의사들이 특별하고 자발적이며 거듭된 요청에 따라 안락사를 시행해야 한다는 제한조건을 두고 있다. 또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는 의학적으로 희망이 없는 상태여야 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논란은 국내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2002년 5월 정부 산하 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소생 불가능으로 판명된 환자의 수술비 등 진료비 지급을 거부해 파문이 일었다. 이는 국가가 건강보험 재정적자를 이유로 시한부 삶을 사는 이들에게 현행법에서 금하는 안락사를 사실상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 산하 116개 의학학회의 모임인 대한의학회는 2002년 5월 5일 임종환자의 치료중단은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의료윤리지침'을 만들었다. 이는 의협이 확정해 발표한 의사윤리지침의 '회복불능환자의 진료중단' 조항을 임종환자에게 초점을 맞춰 구체화한 것으로 무의미한 치료, 심폐소생술 하지 않기, 임종환자의 중환자실 치료의 거절 등 소극적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을 담고 있다. 물론 대한의학회는 이번 지침이 사망에 임박한 환자에게 부가적인 고통만 촉진하는 치료를 유보 혹은 중단하는 경우로 제한하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촉진하는 의사조력자살(안락사)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새 지침은 임종환자에 대해 "치유불가능한 질병으로 적극적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고 사망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되는 환자"로 정의하고, "의사는 임종환자나 가족이 명백히 의미없는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 합당한 진료기준에 근거, 이를 거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안락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는 1997년 12월에 일어난 '보라매 병원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 보라매병원의 의료진은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환자의 부인이 "치료비가 없으니 퇴원시켜 달라"고 요구함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뗀 채 퇴원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법원은 이들에 대해 "회복기의 환자를 퇴원시켜 죽음을 방조했다"며 유죄를 선고했고, 2002년 2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유죄를 인정했다. 윤리지침은 임종환자의 진료중단에 대한 공식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더 이상 제2의 보라매병원 사건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의사들의 의지표명인 셈이다.
안락사 논쟁은 1975년 미국의 '카렌 퀼란 사건'에서 시작됐다. 당시 인공호흡기를 단 채 무의식 상태에서 죽어가는 딸의 모습에 충격을받은 부모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겠다면서 치료 중단을 요구했으나 의사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딸의 인권을 주장하는 부모는 카렌의 후견인으로서 생명유지장치를 뗄 권한을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뉴저지 고등법원은 생명유지장치를 뗄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의료적인 문제이므로 주치의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며 기각했으나, 주 대법원은 1976년 3월 31일 아버지의 주장을 인정하여 장치를 제거해도 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치료의 중단이 죽음을 촉진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사망은 타살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을 불법적으로 살해하는 것과 스스로의 결정으로 생명유지장치의 작동을 중단시키는 것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고 판결 사유를 밝혔다.
고통없이 품위있게 죽는 길은?
안락사의 사전적 정의는 "생존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직결된 문제여서 종교, 윤리, 법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논쟁의 여지는 크다.
안락사 지지자들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강조한다. 생명권은 생명을 물리적으로 연장할 권리가 아니라 생명의 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논리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운운하며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참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락사를 합법화할 경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안락사의 허용은 그렇지 않아도 사회에 만연한 생명경시 풍조를 부채질하게 되며, 철저하게 규제한다 해도 범죄의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고, 환자의 고통이 크더라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결정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안락사는 소극적 의미와 적극적 의미로 나뉜다. 소극적 안락사란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환자가 죽음을 맞게 해주는 방법이고, 적극적 안락사란 원하는 환자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찾게 해주는 방법이다.
두 안락사에는 각각 첨예한 쟁점이 있다.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죄 논쟁을 야기한다. 장기환자에 대한 치료부담을 가족이 책임지는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사회적 살인'이라는 논란이 제기된다. 소극적 안락사는 의사의 임종 판단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쟁점이다. 죽어가는 과정에 접어들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 누가 어떤 절차에 의해 평가할 것인지, 환자의 자율적 의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등이 논란거리다. 치료 중단에 관한 의사표시도 환자 본인이 명시적으로 해야 하지만, 환자에게 의사표시 능력이 없을 경우 가족 또는 의사가 더 이상 치료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이를 가족에게 알려 가족들이 '죽음을 의미하는 퇴원' 또는 '인공호흡기 제거'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것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안락사의 허용 범위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허용 여부로 좁혀지는 추세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적, 윤리적으로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 이탈리아, 그리스, 노르웨이, 한국 등 원칙적으로 안락사를 금지하는 나라에서도 본인이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소극적 안락사를 묵인하는 경우가 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퇴원시키는 경우다. 환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치료를 규정한 의사 윤리의 관점에서도 가혹한 고통을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소극적 안락사는 부분적인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적극적 안락사의 경우 환자를 사망케 하는 의도적 행위가 개입함으로써 자살 방조, 살인 혹은 촉탁 살인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적극적 안락사가 불법으로 규정돼 있지만, 윤리적, 의학적으로 타당한 범위 내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시행한 의사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거나 경미한 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의미없는 목숨의 연장이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는 현실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생명 경시풍조를 우려하는 안락사 반대자들은 여전히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죽어야하는 의무'로 변질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계와 의료계 일부에서는 어떤 형태든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을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며 안락사 제도를 허용하는 쪽보다 말기환자가 품위있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대개의 사람은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확실한 사실을 알면서도 죽을 준비를 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림으로써 그 불길한 '사건'을 늦춰보려고 한다. 또 대부분은 주어진 일생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영원한 이별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죽음을 괴로워한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면서 죽음은 언제라도 닥칠 '나의 일반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위한 출발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명예롭게 죽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史를 바꾼 핵심 논쟁 50 말말말> 권오문, 삼진기획, 2004, 3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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