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카드

살아있는 것의 충고

강산21 2008. 12. 3. 14:26

살아있는 것의 충고


한창 무더운 여름 오후였다. 차의 에어컨을 틀어도 도무지 시원한 느낌이 없었고 창 밖의 가로수들은 가지를 늘어뜨린 채 바람 하나 없는 폭염을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 서울 시내의 4차선 도로인데도 모두들 휴가를 떠난 듯 차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나는 무심코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하얀 현수막 하나가 들어왔다.

열 평쯤 되는 가게의 간판 위에 붙여진 현수막 가운데에는 별이 폭발하는 듯한 형상의 노란색이 칠해져 있었고 그 왼쪽에는 '속옷'이라는 글자가 검은 고딕체 글씨로 쓰여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손으로 쓴 듯한 새빨간 색의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아랫배 근육이 움찔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 차 안에 앉아 이 무슨 짓인가 싶어 한동안 저항을 했지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떠뜨리고 말았다. 그 글자는 '똥값'이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나는 계속 땀을 흘리며 웃고만 있었다. 다행히 뒤에서 채근하는 차는 없었다.

그때부터 하루가 다 가도록 나는 사방에서 똥과 대면하게 되었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 음식점에 갔는데 화장실 앞에 붙여진 것이 화투장의 '똥광'이었다. 그거야 그 전에도 본 것이라 큰 감흥은 없었지만 다시 '똥값'이 연상되는 바람에 나는 화장실 앞에서 배를 잡아야 했다. 화장실 안에서 수많은 똥의 흔적들을 볼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향해 친구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괴로워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음식을 앞에 놓고 똥 이야기를 하는 게 미안했지만 나는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서 낮에 본 현수막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명이란 흰 현수막에 엄숙한 검은 고딕체로 쓰인 '속옷'이라는 말 뒤에 빨간색의 필기체 '똥값'이 주는 시각적 효과가 희극성을 증폭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 몫을 찾아 먹으려는지 내 설명은 '2프로 부족하다 할 때의 그 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짜릿하게 비판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들어간 단어를 나열하며 98퍼센트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 음식점에서 당장 우리가 먹을 수도 있었던 것이 제주도의 '똥돼지' 삼겹살이었다. 제주도 남쪽 대정읍에 추사 김정희가 구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 있는데 '추사 적거지'라는 이름으로 복원해놓았다. 서쪽에 있는 '통시'에는 사람의 배설물을 먹고 크는 돼지 우리가 있다. 바깥채에는 인근의 학생들이 주사를 찾아와서 서예와 학문을 배우던 광경을 묘사해놓았는데 혹 다 자란 똥돼지를 잡아서 함께 먹는 것으로 책거리를 하지 않았을까.

친구는 똥쌍피당구장, 똥쌍피노래방을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왜 화투의 오동을 가게 이름과 결부시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 역시 그가 모를 문제를 하나 냈다. 왜 화투의 오동을 똥이라고 부르는가. 그때부터 분위기가 다소간은 학구적으로 변했고 우리 모두 겸손해졌다.

똥이라는 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혹독한 배변훈련 때문 일 수도 있고 항문기의 고착 때문일 수도 있겠고 그냥 어감이며 실물의 모양, 냄새, 어른들의 금기가 재미있고 우스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아이 같은 어른도 있으며 내가 보기에는 추사 같은 위대한 어른도 아이를 속에 지니고 살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세한도>처럼, 자신의 삶을 함축하고 자타의 경계를 허무는 위대한 예술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철학자 가운데서는 드물게 똥에 관해 이렇게 증언했다. "왕들과 철학자들도 똥을 눈다. 귀부인들 역시 그렇다." 그러나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배설물과 관련된 것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화장실에 대해서도 언급이 거의 없다. 배설이 이미지, 조화, 매력, 유혹, 특히 품위를 파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마르텡 모네스티에, <똥오줌의 역사> 임헌 옮김, 문학동네, 2005)

이런 검열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방송이나 신문기사에서 똥이란 말은 쓰지 않는 게 원칙이다. 배설물이나 대변, 소변 같은 말로 '순화'를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말들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가령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 같은 칼럼에서 ''이라는 말이 난무하면 얼굴을 찌푸릴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 ''''과 동등한 하나의단어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법이지만.

똥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자기들끼리만 알고 쉬쉬하는 것 대부분은 덮어두어서 나빠지는 경우가 더 많다. 광명한 세상에 드러내놓으면 별게 아닌 것들, 이를테면 성이나 정치, 시효가 지난 과거의 비리 같은 것도 감추려 들면 더 썩고 더한 악취를 풍기고 성한 부분까지 오염시킨다. 옆에 있는 건강한 존재가 감염되기도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내가 '똥값'에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느 결에 나 자신이 ''을 금기시하는 '품위 있는', 역사학자와 철학자의 언어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다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입말, 자연스러운 언어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충고일 수도 있고.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문학동네, 2008, 308-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