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카드

월남 이상재의 언어감각

강산21 2008. 12. 5. 16:59

월남 이상재의 언어감각


1910년 한일합방 뒤 많은 지도자들이 변절했다. 변절은 아니더라도 일본 천황의 작위를 받은 사람들이 적잖았으나 이상재만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재 역시 일본 시찰단에는 끌려갔다. 그 때의 일이다. 이본 사람들은 여기저기 명승지와 일본의 발전상을 구경시킨 다음 이상재를 보고 감상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기 와서 새어머니를 만나보니 죽은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고 대답했다.


또 일본 사람들이 일본에서 제일 큰 병기창과 군수 공장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날 저녁에 도쿄 시장이 베푼 환영회 석상에서 이상재에게 감상담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간다는 병기창을 구경하니 과연 일본이 동양에서 제일 강대국임을 알게 되었소.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성경에 칼로써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했는데 일본이 그처럼 칼을 쓰다가 망할까 하는 일이오."

이 말을 듣고 일본 사람들은 아연실색한 채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다음 이상재는 재일본 도쿄 조선인 YMCA의 안내를 받아 그 사업장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구한국 시대의 주일 한국 공사관이 있던 자리였다. 그곳에서 학생들이 이상재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하니 갑자기 큰 소리로 헛웃음을 웃더니 우는 것이 아닌가! 그는 결국 강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울다가 눈물을 닦으면서,

"나는 평생 울지 않으려고 한 사람인데 오늘 울고 말았다. 내가 이 곳을 한국 공사관 때에 와보고 오늘 다시 와보니 옛 일이 새로워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오늘 청년 제군을 만나보니 타국에 와서 부모 잃은 동생들을 만나본 것 같아서 울었다."고 했던 것이다. 다음날 일본 신문에는 '이상재 옹 울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났다.


이처럼 그는 일본에 끌려가기는 했지만 거기서도 청년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교훈을 주는 데는 일정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형식이나 사전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완전한 야인으로 사석이든 공석이든 어디서나 기회만 포착되면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를 연발했던 것이다. 보통 애국자 같으면 일본으로 끌려가는 것부터가 지조를 파는 일이라 하며 거절했겠지만 이상재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다른 애국 투사와 다른 점이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나라가 망한 뒤 이완용이 조선미술협회를 창설하여 그 발회식에 이상재를 초청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따위 매국노의 초청을 당장 거절했겠지만 그는 거절하지 않고 그곳으로 갔다. 가서 보니 그 식장에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위시하여 많은 일본 고관들이 와 있었다. 식이 끝난 뒤 피로연이 시작되었을 때 바로 앞자리에는 이완용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이토 통감과 송병준과 같은 매국노들이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을 대하고 앉아 있으려니까 이상재는 갑자기 비위가 상하였다. 그는,

"대감네들, 도쿄로 이사 가시지요."라고 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영문을 몰라,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오."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상재는 태연스럽게 "대감네들은 나라 망치는데는 천재가 아니오! 도쿄로 이사 가시면 일본도 망할 것이니까 하는 말이오."했다.

이 말을 들은 연회석상의 사람들은 아연실색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또 한번은 일본인 헌병 사령관의 초청을 받아 연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사령관은 "요새 감기에 걸려서 몹시 불편하다."는 말을 했다.

이상재는 속으로 '제가 몸이 아프면 아팠지 그것을 손님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는가! 너무 거만하다'고 생각하고 즉석에서,

"사령관님, 그 감기는 대포로 쏘아 죽이지 못하오?"하며 그를 놀려 주었다.


<이상재 평전> 전택부, 범우사, 1985, 158-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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