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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신분증

강산21 2008. 11. 20. 00:41

명함

-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신분증


조선시대 초엽의 일이다. 의정부 녹사 윤처관이 어느 날 이른 새벽에 박원형 영의정의 집을 찾아가 명함을 전하고 만남을 청했다. 그러나 문지기는 정승이 취침중이라는 이유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결국윤처관은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다지쳐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분한 마음에 아들 효손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디 너는 큰 인물이 되어 이런 모욕을 당하지 말거라."

효손은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명함의 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정승의 늦잠이 지나쳐, 대문 앞 명함에 털이 났도다. 꿈속에서 혹시 옛날 주공(周公)을 만나거든, 그 때 토악(吐握)하던 수고를 물어주시오."

이는 주공이 식사하다가도 입에 넣었던 밥을 뱉고 손님을 맞이한 일이 세 차례나 되고, 감던 머리를 쥐고 나와 손님을 맞이하기를 세 번이나 했는데, 정승은 어찌 그렇게도 거만한가를 나무라는 뜻이다.

이튿날 윤처관은 그런 글이 쓰인 줄도 모르고 그 명함을 다시 가지고 가서 다시 정승댁에 들여보냈다. 정승은 그 시를 보고 즉시 불러 뒤를 가리키며 누가 썼느냐고 물었다. 윤처관은 글씨를 보고 자기 아들의 필체임을 알고는 당황하여 엎드려 사죄했다. 하지만 정승은 껄걸 웃으며 효손을 칭찬하고는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명함의 어원과 유래

명함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춘추시대 사람인 공자도 명함을 썼다. 그 시절에는 누구를 방문해서 못 만나면 명함을 놓고 가고, 집에 돌아온 주인이 그것을 보면 바로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행세하는 사람들의 법도였다.

조선시대에도 정초 세배를 다니다가 어른이 안 계시면 자기 이름을 적은 종이를 놓고 갔던 세함(歲銜) 풍습이 있었으나, 이것은 명함보다는 연하장 성격이 더 강했다. 이 세함은 위 일화처럼 용무가 있을 때 신분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 명함의 본래 이름은 '명자(名刺)'이다. 여기서 ''라는 글자는 '대나무 같은 것을 깎아서 거기에 글씨를 쓰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청 시대에 와서는 '명첩(名帖)'이라고 해서 종이나 비단에다 붓으로 붉은색 글씨를 써서 신분을밝혔다. 그 시절에는 초면인 사람에게 꼭 출신지, 이름, 감투 따위를 적은 명첩을 건네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들의 예절이었다.

서양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명첩보다는 인쇄해서 쓰는 '명편(名便)'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그 명편이 한국과 일본으로 퍼져서 '명함''메이시'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로 명함을 사용한 사람은 민영익과 유길준이다. 두 사람은 18837월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신분을 밝히는 용도로 자기 이름을 필기체로 적은 명함을 사용하였다. 그 크기는 가로 5.5㎝ 세로 9㎝로서 요즘 명함과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 화신백화점을 운영한 사업가 박흥식은 순금 명함을 내밀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인 총독과의 면담을 성사시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명함의 기능을 교묘히 활용한 뇌물인 셈이다.


서양의 비지팅 카드

흥미롭게도 서양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었다. '비지팅 카드'(visiting card)라고 해서 만나러 간 사람을 못만나고 돌아오게 될 때에 자기 이름을 남기는 풍습이 그것이다. 16세기 중반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유학갔던 한 학생이 귀국 날짜를 받아놓고 스승들께 인사를 다니다가, 못 만나고 떠날 몇몇 스승들에게 자기 이름을 적은 카드를 남긴 것이 효시라고 전해진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서양에서는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사람이 없으면 명함을 남겨두고 나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 때 명함에다가 이름, 직업, 주소 따위를 적는 것보다 방문 목적 밝히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반드시 명함 한쪽을 접는 것이 관행이다.

명함 한쪽을 접는 풍습은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1882년 출판된 <우리의 행실>이라는 책에서 저자 존 H. 영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명함을 사용해 방문 목적을 살릴 수 있다. 명함은 봉투에 넣어 심부름꾼을 통해 보낼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가 두고 올 수도 있다. 직접 방문해 명함을 두고오는 경우에는 명함의 한쪽 귀를 접어야 한다."

이렇듯 명함은 초기에는 방문 의사 전달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쓰임새는 여전히 유효하다.


명함판 사진이 널리 퍼진 이유

하지만 명함은 점차 개인의 신분,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함판 사진이다.

1854년 프랑스 사진가 앙드레 아돌프는 렌즈 네 개가 달린 명함판 사진 카메라에 대한 특허를 받은 뒤 상업적으로 적극 활용했다. 그는 가로 5.69㎝ 세로 8.44㎝ 크기의 음화 필름 8장이 나오면, 원판대로 나온 큰 인화지를 잘라서 대략 가로 6㎝ 세로 9㎝ 크기의 명함에 붙여서 사용했다. 즉 값싸고 작은 초상을 명함 대신으로 사용했던 것인데, '명함판 사진'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사진이 귀한 시절 자기 얼굴 사진을 명함으로 내미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였기에 명함판 사진은 프랑스와 영국 귀족사회에서 크게 유행했고, 신흥 자본가들이 귀족처럼 행세하기 위해 다투어 명함판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사진으로 명함을 대신하는 풍속이 사라졌지만, 여권에 붙이는 사진규격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현대 들어서 명함은 한층 더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직장인만 가지고 다녔던 명함을 상인은 물론 전업주부나 학생까지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주의가 한층 강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뭐든지 흔해지면 튀고픈 욕망이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이다. 명함 역시 그러해서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가 반영되고 있다. 얼굴사진을 넣어 신뢰를 강조하거나 귀여운 캐릭터를 이용해 자기 성격을 드러내는가하면 특별한 고객을 위해 금박명함을 만들기도 한다.

아무리 기술이 진보해도 인쇄명함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나를 기억하게 만들고픈 욕망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그것 100가지> 박영수, 숨비소리, 2008, 340-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