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네오휴머니즘 신자유주의 넘을 열쇠” | |
조합원 공동소유 바탕 노동 기여 따라 성과급 ‘영성’으로 이기심 막아 자본·사회주의 넘는 제3의 길 | |
한승동 기자 | |
다다 마헤시와라난다 지음·다다 칫따란잔아난다 옮김/물병자리·1만원
“1970년에 국제자본의 90%는 무역과 장기투자(대체로 생산부문 투자)에 사용됐으며, 10%가 투기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는 이 숫자가 뒤바뀌었다.” 프라우트 운동가 다다 마헤시와라난다가 2003년에 낸 <건강한 경제모델 프라우트가 온다>(AFTER CAPITALISM: Prout’s Vision for a New World)에 서문을 쓴 노엄 촘스키는 불과 20년 만에 국제자본의 90%가 투기자본화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현재의 경제제도는 실패작이며, 거의 재난에 가깝다”고 썼다. 2007년 월든 벨로는 하루 약 1조9000억달러의 돈이 투기 도박장에서 거래된다고 했다. 지금 전세계 하루 자본거래액 가운데 실물경제와 관련된 것은 2%에 지나지 않으며 98%가 투기거래다.
이 만연한 투기의 수혜자들은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포브스>(2007년 5월3일)는 애플컴퓨터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받은 연봉은 6억4800만달러로 애플사 초년생 연봉의 3만배나 된다고 전했다. 이 잡지가 발표한 2006년도 ‘억만장자 명단’을 보면 세계 최상위 부자 52명의 재산은 최근 4년간 2배 이상 늘어 1조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전세계 인구의 절반인 30억명의 1년 소득액보다 많은 것이다. 그 결과 지금 66억 세계인구의 3분의 2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중산층’은 양극분해돼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이른바 ‘레이건 혁명’과 영국 ‘대처리즘’ 등장 이후 본격화한 정치적 신보수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몰고온 재난을 한국인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 이미 처절하게 체험했다. 지금 그때보다 더하다는 대재난이 다시 밀려오고 있다. 이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가 아니라 ‘다른 세계는 가능해야 한다’는 외마디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공통적인 이익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을 비판하며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한 점에서 사카르는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영성과 종교적인 도그마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종교 전도사들이 과거 세계 곳곳에서 인류를 착취했으며, 오늘날에도 같은 짓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아난다 마르가와 프라우트가 단순한 종교조직이나 신앙 차원의 비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성’을 강조하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일 리도 없다. 프라우트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촘스키는 이를 “협동조합 중심의 경제적 민주주의”라고 했고 지은이 마헤시와라난다는 “일종의 통합적 거시경제 모델”,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회와 경제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를 담은 청사진”이라고 했다. 핵심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는 사업을 통하여, 구성원들의 공통된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필요성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뭉친 사람들의 자율적인 협회”로 정의되는 협동조합이다. 프라우트 협동조합은 사적 소유를 인정한 바탕 위에 지분을 나눠 가지지만 이 투자 지분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다. 투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누구에게나 기본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기술이나 노동 기여도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되 최고임금에 상한을 설정해 최저임금과의 격차를 일정 한도 내에서 제한하며 조합 생활수준의 전반적 향상에 따라 그 차이는 점점 줄어드는 구조로 돼 있다. 공동소유이니 해고 같은 것도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면, ‘영성’은 사카르가 “정신병”이라고 못박은, ‘이윤을 무한 추구하는 탐욕과 이기심’을 원천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형이상학적 장치다. 사카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우주심, 지고의 존재와 연결돼 있는 한몸이자 하나의 가족으로서 공명·공감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영성가족’ 개념을 얘기하면서 그것을 확장된 휴머니즘 곧 네오휴머니즘이라 일컫는다. “프라우트의 목적은 경제성장이나 부의 축적이 아니라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시키고 무한한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요한 갈퉁) 프라우트가 과연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세계의 비전’이 될 수 있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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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8-11-14 오후 07:4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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