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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없습니다 (박완서)

강산21 2008. 10. 31. 12:35

이의 없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부터 시작되는 산상수훈처럼 널리 알려지고, 신자 아닌 일반인들도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인간에게 말이 있어온 후, 말하여진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도 하더군요. 처음엔 저도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덩달아서 좋게 들렸습니다. 좋은 시를 읽을 때 그 뜻을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마음에 들어오는 몇 구절과 음률만으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그렇게 설교하신 것은 새겨듣고 그대로 실행하라는 뜻이지 입술로 읊어대기만 하라고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막상 뜻을 알고 읽기로 마음먹으니까 저는 첫 구절부터 걸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옹호자로 오신 것은 알겠지만 마음까지 가난하라니요? 저는 빈한한 농촌,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만 어려서부터 집안이나 마을 어른들로부터 가장 자주 들어온 말이 아무리 없이 살아도 마음만은 넉넉해야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말로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허리띠를 졸라맬지언정 남에게는 후하게 나누는 것을 사람 노릇의 으뜸으로 쳤고, 그런 전통적인 미덕에 의해 아무리 혹독한 흉년이나 전쟁 중에도 마을공동체가 와해되지 않고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씀씀이야말로 마음의 부자 노릇이라고 믿어왔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 최고의 상을 준다고 하는지, 그건 당신이 일관되게 설하신 사랑이나 나눔의 정신과도 앞뒤가 안 맞아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마음을 우리가 물질적인 걸 쟁여놓은 창고와 비유하여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부자들의 창고일수록 보물로 가득차 있을테니 보나마나 문을 꼭꼭 걸어잠가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별로 대수로울 것이 있을 수 없는 빈자의 창고는 문단속이 허술할밖에요. 아예 활짝 열어놓고 산다 한들 불안할 것도, 누굴 의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혹시 빈자의 창고처럼 열린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꽉 찬 창고란 더 이상 물건을 들일 수 없는 창고라는 뜻도 될테지요. 비록 자기가 지닌 것보다 더 나은 보물이 있다고 해도, 그는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번 주입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남의 말을 전혀 들을 줄 모르는 사람, 머릿속이 온통 지식으로 꽉 차서 단순한 진리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교만할까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도 될 것 같군요. 또 보물이 가득찬 창고를 가진 부자는 한시도 마음이 놓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튼튼한 자물쇠를 채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심복으로 창고지기를 삼고 나니 한시름 놓은 것 같아 생전 처음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창고로부터 몸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창고한테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믿기로 한 창고지기가 못 미더워지면서, 내 재산은 내가 지켜야지 이 세상에 누굴 믿나 싶어 다시 집으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창고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유인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실로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유인이라면 하늘나라를 상으로 받을만 하군요. 예수님, 당신 말씀에 이의 없습니다.

마태 5장 1-12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박완서, 열림원, 2008, 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