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따뜻한시선

패자의 역사

강산21 2005. 3. 24. 09:27

패자의 역사

 

요즘 역사 공부에 관심이 늘었고 어느정도 재미도 붙였다. 광명에 있는 '역사깊쑤기'라는 동아리에 속하여 <강좌 한국근현대사>라는 책을 텍스트로 하여 토론하는 모임에 가입했는데 아직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의 일들을 왕조사관에 입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은 것은대단히 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다.

 

세상사가 늘 그래왔듯이, 그리고 우리 역사의 정리가 그랬듯이 가진 자와 권력층의 입장에서 집필되어 온 것에 대응하여 민중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구분하여 학습한다는 것은 그리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학습 과정을 경험한다는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후로는 분명한 시각으로 오늘을 바라볼 수 있으니말이다.

 

이 책을 공부하던 과정에서 알게 된또 다른 책의 제목이 <패자의 역사>이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필자가 전문 연구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지금까지 다루어왔던 역사의 장면들에 대한 서술의 방식을 뒤집어 민초의 시각으로 나타내 보였다.민중사관으로 집필한 역사책이 나온 것이 80년대 후반이니까(그래서그 <한국민중사>라는 책을 낸 출판사 대표는 구속된 바 있다) 처음인 시도는 아니겠지만 시원하게 역사의 단면들을 새롭게 해석해낸 그의 시도는 의미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승자가 아닌 패자의 상황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반대의 입장에서 고찰해 본 그의 과정은 상식처럼 되어버린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안내한 것이니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전문연구자가 아니기에 때로 과장된 언사나 자신의입장을 강조하는 어투가 불만스러울 수는 있으나 그 점을 상쇄할만한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가령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의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에 관한 내용은 정설로 굳어져 있지만역사적 고증을 통해 허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백제 멸망 당시 백제수도였던 사비성의 인구는 5만에 불과했는데 남녀구성비를 반반으로 잡으면 여자가 25,000이고 궁녀가 될 수 있는 연령대인 15-25세인 여자의수는 약 4천명으로 잡을 수 있기에, 그렇다면 그 중의 3천명이 궁녀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허구가 정설이 된 과정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이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천년이 지난 후인 조선 중기의문인들의 시에서였다고 하고,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인식된 것은 일제시대의 대중가요의 가사였다고 한다. 나라잃은 3천 궁녀의 비극적인 소재가 일제시대의 정서와 맞았기 때문에 그 곡은 애창곡이 되었고 대중의 머릿속에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의자왕의 뒤를 따르며 통곡했던 백제의 백성들이 있었고 그를 그리워하는 노래가생겨날 정도였다는 것은 의자왕이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는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의자왕에 대해 '과단성있고 용감한 왕, 신중하고 사려깊은 왕'으로 묘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랑방탕하고 사치를 일삼으며 3천씩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나쁜 왕이라는 것이 정설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패자였기에 그렇게 정리되었다고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잘못된 역사적 인식에 대한 지적을 하는 책을 볼 기회를 얻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책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역사책이 재편되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하다는사실이다. 왜곡은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기도 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며, 나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일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을 제대로 갖는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을 가지려면 대단한 정성과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어려움이다. 그렇다고 왜곡되고 허구의내용을 정설로 인식하고 수용하여 후손에게까지 내려주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 못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에 대한 깊이있는 인식을 위한 노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가야 할 길인 것이다.

 

김성현 /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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