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따뜻한시선

양선

강산21 2005. 3. 11. 12:25

[시사칼럼] 양선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그다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선'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아홉 가지 삶의 모습이 나오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대리역할을 하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하다는 것들인데 '양선'은 그 가운데서 유별나게도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추정하기에는 다른 것들은 상대적으로 단어가 주는 명확함이 보이는 반면 '양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굉장히 중요하고 강한 덕목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양선'은 이런 것이다. '의와 선을 겸하여 지닌 것' 말이다. 의를 이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동시에 선을 갖는 것도 중요한데 둘을 겸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기에 중요도로 따지고 보면 결코 밀릴 형국이 아니다.


'의'라 불리는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집에 세들어 살면서 집세를 내지 않는 과부를 내보내는 것이 정상일 수 있다. '의'라는 기준에 따르면 집세를 내지 않는 이를 추방하는 것이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과부를 대신하여 집세를 내주는 모습을 갖는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면서 갖출 수 없는 덕목을 '선'이라는 관점에서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도 소중하고 '선'도 소중하다고 한다면 이 '양선'은 갖는 의미는 너무도 중요하다. 세상을 날 선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자르고 붙일 재단의 모습만 남기 마련이지만 종교적인 덕목에서 본다면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며 바람직하지 않기에 '선'이라는 관점에서 채워주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날 선 가운데서 싸운다 하더라도 종교인은 그 가운데서 비난을 받을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약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은 부자의 편도 가난한 이의 편도 아니다. 다만 약한 자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부분이 강조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신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며 사는 종교인들이라면 '양선'이라는 가치는 결코 포기해서도 포기할 수도 없는 덕목이 된다.


김성현 / 주간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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