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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춘 칼럼] 독재는 아직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아니다

강산21 2008. 8. 19. 18:05

KBS사태, "이보다 더 야비할 수는 없다"

[유시춘 칼럼] 독재는 아직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아니다.

유시춘, 작가

등록일: 2008-08-19 오전 4:06:06

KBS는 국가 기간방송이다. 11개 자회사, 9개 지방총국, 16개 지역국을 거느리고 있다. 본사에만 지상파 TV와 라디오 9개, DMB 4개등 총 15개 채널을 운영한다. 연매출 1조를 훌쩍 뛰어넘는 울트라수퍼 공룡이다. 게다가 지난 5년간 착실히 콘텐츠를 혁신하고 보강해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라는 월계관을 쓰고 있다.

그러니 어느 정파든간에 침을 흘릴만 한 매력적인 홍보수단이다. 그런데 이 거대공룡의 사령탑에 앉은 자가 자유언론운동의 상징인 동아투위의 정연주이다. 정연주는 동아투위의 해직기자로서 신산스러운 풍찬노숙을 해오다가 한겨레신문 창간 이후 매우 저렴한 ‘워싱턴특파원’으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그는 이제 일반명사가 되어버린 ‘조. 중. 동’이란 말을 창조했다. 현정부와 한나라당은 이 ‘눈엣가시’를 제거하기로 맘먹었다. 그들은 ‘2004년 노무현탄핵당시 KBS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정연주를 일찍부터 벼르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성찰해 볼 생각은 않고 미성숙한 자들이 늘 그러듯이 애꿎게 남탓으로 돌린다.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 노골적이고 구시대적이다. 법정 임기를 많이 남겨둔 사장을 제거하기 위해 구사하는 방식이 이제는 제법 희미해진 군사독재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정연주 하나 제거하겠다고 국가기구를 총동원하는 작전이 그렇다. 검찰, 방통위, 감사원까지 연합작전을 펴고 정연주의 개인비리를 샅샅이 뒤진다. 털어서 먼지안나는 자 없다고 했건만 아직 살만한 집 한 채 소유하지 못한 정사장은 그 흔한 여자관계나 법인카드의 부적절한 오용도 없었던 모양이다.

 
▲ 지난 8월 8일 아침 8시경 KBS 내부로 들어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여의도 공원에서 대기중인 사복 입은 경찰기동대원들 
ⓒ 커널뉴스 이강연 기자

억지춘향으로 만들어 붙인 게 1500억 경영적자란다. 그것도 정사장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노조에서조차 적자 아닌 189억원 흑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한나라당은 정사장에게 무능과 편파라는 딱지를 붙인다. 세상에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를 만드는 무능도 있는가? 노무현정부때 날이 날마다 앵무새처럼 ‘코드인사’를 규탄하던 그들이 낯색 하나 바꾸지 않고 방송계의 코드를 일치시키려는 게 정연주사태의 본질이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넘어와서 맨 먼저 한 일은 방송사 마이크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군사정권은 애초부터 민주적 절차를 거추장스러운 ‘절차’와 비용의 ‘낭비’로 생각하는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

박정희는 그래서 ‘유신’을 단행하고 전두환은 ‘언론통폐합’을 총칼로 단번에 해치운 것이다. ‘유신왕정’과 ‘5공’은 오로지 이 언론의 무덤으로부터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현정권이 열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게 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의 언론장악이라는 헛된 꿈이다. 그들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우리 국민이 얼마나 변화 발전하고 진화했는지. 지난 시대에는 정보의 유통경로를 독점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는 보는 바와 같이 우리 국민은 이제 그 때의 국민이 아니다. 지난 십수년간 한무리의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한 안티조선 운동은 그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찻잔 속의 태풍을 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일보 사옥 앞에 네티즌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도 쓰레기를 쌓아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은 한동안 인터넷의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이제 대중은 정보를 스스로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이 드넓은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는 가치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집단 지성’의 현주소이다.

감사원과 방통위는 그 법적지위가 대통령직속기구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중립’을 지키도록 법규에 규정되어 있다.

정부기구와 공기업을 감시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으며, 방송과 통신이 국민적 이익을 위해 작동할 수 있도록 국가의 권능을 행사하기 위한 조치이다. 정치적중립성을 생명으로 권능을 행사하는 이들 국가 기구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그 신뢰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KBS가 과연 ‘정권 프렌들리’로 변화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한번 자유와 비상을 경험한 영혼은 결코 그 이하로 추락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이 87년 6월민주항쟁 그 이전의 상태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지금의 네티즌들에게 유신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득한 원시시대를 보는 것같이 반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한세대 이전의 일이다.

한국언론계의 대표자격으로 유일하게 중국정부의 공식초청을 받은 정연주를 출국금지까지 시키는 이 무리수와 단견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국가기구의 목을 향해 날아들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감당할 수 없는 신뢰의 추락이 될 것이다.

정연주는 사장직에서 해임된 지 하루만에 검찰에 강제구인됐다가 조사를 받고 석방됐다. 한 무력한 인간에게 가하는 국가권력의 전방위적 공격을 보면서 이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잊혀진 5공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권양이다.

86년 그 해 여름도 올해처럼 뜨거웠다. 권인숙은 서울대 재학중에 스스로 인천의 한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가 되었다. 군사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국민들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 가장 ‘낮은자’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국가는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구사했다. 성고문을 자행한 경찰은 거짓말을 모의했고, 검찰은 그녀를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팔아먹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매도했다. 부끄럽게도 이 나라의 가장 힘쎈 언론은 그런 검찰의 거짓말을 한자 한획 틀림없이 그대로 대서특필했다. 사법부는 그런 검찰의 공소장과 다르지 않는 판결문으로 그녀를 단죄했다.

그녀는 가녀린 스물두살 여학생의 몸으로 교도소 안에서 저항했다. 여성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고발장을 쓰고 항거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녀는 승리했다. 모든 거짓은 드러났고 성고문 범죄자는 감옥으로 갔다.

실로 한 연약한 여성에게 국가는 연합전선으로 무자비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이것이 부도덕한 국가권력의 모습이었다. 현정권은 그때처럼 정통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민이 선택한 정부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국가권력을 정파의 도구로 쓰라는 위임장은 아니다.

진실은 힘이 세다.

물리력을 가진 자들이 폭력으로 지하 깊이 쳐박아도 진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란다. 언젠가 볕이 들고 수분이 공급되면 진실의 나무는 싹을 틔우고 푸르른 잎을 거느린다.

사람들은 그 때 그 ‘불편한 진실’을 고통스럽게 대면한다. 정연주를 무능하고 편파적이다하여 국가기구를 전방위로 동원해 제거한 이 진실은 언젠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가 부단히 진보한다고 믿는 이들의 소신이다.

그러나 그 ‘불편한 진실’이 아무 노력없이 그대로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환경과 조건이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만드는 것이다.

정연주의 제거와 구속여부의 부당한 현실 앞에서 막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나는 자신을 돌아본다.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뇌리를 때린다.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가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중년기의 건강을 짐짓 걱정하면서 몇이는 포커를 하러가고 또 몇 사람은 춤을 추러 가고 몇 사람은 허전하게 동숭동 옛길을 걸으면서 아무도 뜨거웠던 엣날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현실을 나는 돌아본다.

그래서 몇 줄 글로나마 쓴다. 독재는 아직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아니다. 파시즘은 이제 지구에서 사라졌지만 그 본성과 경향을 지닌 정치세력은 여전히 건재한다. 그것의 이름은 ‘친절한 파시즘(frendly pas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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