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아침햇발] ‘08년 체제’의 시작 / 김지석

강산21 2008. 6. 20. 15:21
[아침햇발] ‘08년 체제’의 시작 / 김지석
아침햇발
한겨레 김지석 기자
» 김지석 논설위원
한 시대의 시작이다. 계속되는 촛불집회 속에서 새 체제가 움트는 모습을 우리는 본다. 바꿔 말하면 한 시대의 끝이다. 20년 이상 이어진 ‘87년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그간 담론으로만 존재하던 ‘08년 체제’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6월 항쟁의 성과물인 87년 체제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 체제가 만든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이뤄진 내용은 크게 셋이다. 첫째, 민주화다. 군사독재에서 민주 체제로 이행한 데 이어 여야 정권교체 등이 이뤄지면서 절차적 민주주의 수준이 높아졌다. 둘째,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대기업이 주도한 경제·산업 구조의 세계화·자유화와 더불어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 구도가 굳어졌다. 셋째, 남북 화해다. 수십년 지속된 대결 구도가 바뀌어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내다보는 상황까지 왔다.

 

이 체제는 이제 심각한 질곡이 됐다. 촛불집회는 그동안 불완전하게나마 작동하던 정치 체제에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지금 국회와 정당은 있어도 없는 듯하다. 국민들의 높아진 민주화 욕구를 담는 그릇으로서 이미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역시 정면으로 거부된다. 미국 쇠고기 문제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신자유주의를 기조로 하는 교육 시장화, 의료보험·공기업 민영화, 언론장악·방송민영화, 대운하, 물 사유화 등에 대한 반대로 진화했다. 주요 정책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거부된 것은 유례가 없다. 남북관계도 새 정부 출범 이후 역풍이 거세다. 한국이 한반도·동북아 정세 변화를 주도하고 통일 기반을 넓히기는커녕 걸림돌이 될 조짐마저 보인다.

 

기존 체제가 힘을 소진한 이상 새 체제로의 이행은 이를수록 좋다. 새 체제가 담아야 할 내용은 분명하다. 첫째,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결합이다. 새로운 의사결정과 소통 방식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정치권과 국민 사이 벽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어떤 형태든 정부와 정치권, 시민사회를 아우르는 협치 구조가 필요하다. 둘째, 국민 다수에게 고통을 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전면 재검토다. 국민의 삶의 질을 보장하면서 성장 동력을 키워나갈 사회·경제 체제가 필수적이다. 셋째, 평화와 통일을 향한 주도권 확보·강화다.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통일을 앞당길 준비를 하고, 그에 맞게 외교·안보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

 

새 체제 이행 과정은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하나는 지금처럼 국민과 정부의 대결이 계속되는 것이다. 정부는 어떤 정책도 힘 있게 집행할 수 없고 촛불시위는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모든 책임을 바로 대통령에게 묻는 재신임 또는 탄핵론이 힘을 얻을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우여곡절을 거쳐 새 체제가 만들어지더라도 나라 전체가 많은 상처를 입은 뒤일 것이다.

 

다른 시나리오는 이명박 대통령이 제구실을 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그가 말하는 ‘쇠고기 미봉책’에 만족하지 못한다. 재협상까지 가지 않으면 신뢰를 얻기 어렵다. 동시에 정파적 이해를 넘어선 거국내각을 구성해 기존 정책기조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한 세대는 지속할 새 민주제도를 창출하기 위한 정치협상 틀을 짜 법적·제도적 개혁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런 조처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올해 안으로 새 체제가 닻을 올릴 수 있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87년 체제를 넘어 신발전체제가 핵심인 08년 체제로 이끌겠다고 했다. 하지만 신발전체제는 불과 몇 달 만에 파탄하고, 대신 국민들이 새 체제로 향하는 거대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