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세상읽기] 배후의 리더십 / 배병삼

강산21 2008. 6. 20. 15:19
[세상읽기] 배후의 리더십 / 배병삼
세상읽기
한겨레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영·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였다. 특히 정조는 경학에 밝았다. ‘경연’이란 본시 신하가 임금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정조는 도리어 그 자리에서 신하를 가르쳤다. 그가 던진 질문은 정약용 같은 신예에게조차 평생 화두가 될 정도였다. 이런 정조의 위상을 군사(君師)라고 칭한다.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뜻이다. 큰 영예다. 플라톤이 꿈꾼 이상적 군주, ‘철학자·왕’을 몸소 시현한 셈이다.
 

한데 정조가 죽자 정국은 곧 세도정치라는 반동으로 추락한다. 하면 어째서 황금기가 그토록 짧고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을까?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영예 바로 그 속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맹자라면 이 지적에 찬동하리라. 그는 전국시대 혼란의 뿌리가 “스승 되기 좋아하는 버릇”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임금들이 자기 가르침을 받는 신하는 좋아하지만, 임금을 가르치는 신하는 싫어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

 

힘으로 말하는 사람이 권력자요, 이치로 말하는 사람은 스승이다. 둘 다 혼자서 말하고, 또 아래를 향해 말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니 ‘스승이자 군주’의 말은 힘으로나 이치로나 거역할 수가 없다. 여기서 완벽한 독백의 공간이 탄생한다. 독백 속에는 권력은 가득 차 있지만, 함께하는 정치는 부재한다. 세도정치의 씨앗은 ‘군사’인 정조가 뿌린 게 맞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약용은 대화와 논쟁 속에 정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에게 부친 편지 속에서 요순 정치의 핵심이 “제 목소리로 스스로 말하기”에 있다고 들뜬 필치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정조의 통치가 독백적 구조인 탓에 파산하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소통, 즉 대화와 논쟁을 통해 정치를 복원하는 데 있음을 그는 알아챈 것이다.

 

최근 대통령은 총리를 위시한 각부 장관과 청와대 참모진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려 한다고 들었다. 아마 맹자라면 대통령을 가르칠 정도의 인물을 선발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조언할 것이다. 또 말은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 대통령에겐 듣기를 권할 것이다. 듣는 귀는 말하는 입보다 높이 달려 있으므로, 귀담아들으려면 몸을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곧 일을 제대로 알려고 든다면, 겸손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정치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점도 지적하리라.

 

한편 다산이라면 현 정국의 문제가 보고하고 지시하는 회의 방식에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앞 정권의 “계급장 떼놓고 토론하기”는 지나치다 하더라도, 제 목소리로 제 주장을 내세워 쟁론하는 회의 방식은 꼭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할 테다. 이름은 ‘회의’(모여서 함께 의논함)라고 해놓고 윗사람 혼자서 말하고 나머지는 듣고만 있는 것은 조그만 학교에서 큰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병폐다. 요컨대 국무회의든 참모회의든 자기 업무를 담당자들이 큰 소리로 주장하고 대통령은 그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기, 이것이 다산이 권하는 회의(소통)의 모습이라는 것. 덧붙여 대통령을 뜻하는 영어, 프레지던트(president)가 본시 ‘사회자’를 뜻함은 이 대목에서 함께 참고할 만하다.

 

독백 속에는 ‘함께, 더불어’가 부재한다. 내 사람을 공공기관에 심는 것도 고작 독백의 구조를 확산시킬 따름이다. 독백적 조직은 너의 것일 뿐 우리의 것일 수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그 책임 역시 단 한 사람에게 귀결한다. 나머지 사람에겐 그들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사태가 지목한 것도 오로지 한 사람이었고, 그 촛불을 끌 사람도 단 한 사람뿐임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 “필요한 게 뭡니까?”라고 묻는 배후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