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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대의민주, 촛불은 폭력인가, 저항인가?

강산21 2008. 6. 16.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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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대의민주, 촛불은 폭력인가, 저항인가?

"집단지성"과 "직접민주주의" 앞에 너무도 초라한 정치인들

박정원, msmwjp@chol.com

등록일: 2008-06-16 오전 12:03:12



이제 촛불집회도 어언 40여 일, 매일 밤이면 길거리에 나와 애를 쓰는 시민은 물론이려니와 이들의 청와대 행을 막아야만 하는 경찰도, 밤이면 밤마다 쫓아다녀야 하는 기자들도 마찬가지로 힘든 시간이다.

이즈음 회자되고 있는 말들이 ‘직접민주주의’ 그리고 ‘집단지성’이다.

국민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정치권에 던지는 위력이 큰 만큼, 이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와 그 한계를 걱정하는 목소리와 함께 새로운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광화문 경찰 저지선 모습 - 전경버스 앞에 경찰저지선을 만든 모습!
ⓒ 커널뉴스 사람과정치 박정원 기자
어제는 광화문 앞에 경찰이 전경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친 것은 물론 그 앞에 폴리스라인을 정하고 정복을 입은 직업 경찰을 세웠다.

‘명박산성’이라는 비아냥을 의식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컨테이너를 치운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현명한 처신이었다 할 것이고, 또한 버스 몇 미터 앞에 폴리스라인을 표시하고 평범한 정복 경찰을 세운 행위 또한 경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대응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현재 촛불집회에 나오는 이들은 결코 특정한 이념과 방법론으로 조직된 대중이 아니며, 따라서 당연하게도 무장 혁명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들 또한 아니다.

시민들이 청와대를 가자고 하는 행위 또한 시위의 한 방법일 뿐이며, 5월 31일 우연하게 청와대 인근까지 도달하게 되었음에도 경찰의 저지선을 과격하게 돌파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었음에 불구하고 경찰이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이를 제압하려고만 한 행위를 되짚어 볼 때 우리 경찰 또는 경찰의 수뇌부, 그리고 정권의 핵심 인물과 실무자들의 의식구조가 아직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의식 평균에 현저하게 못 미치고 있음을 대변해 준 행위였다 할 것이다.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이 시민들에게서 느꼈던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의 눈치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던 이들이 알아서 처신한 행위가 오히려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할까, 시민들은 오히려 이런 모습에서 독재와 파쇼의 위험을 깨달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위의 목적을 떠나, 시위를 막아선 이들의 행동에서 시민들은 어느덧 이 정권의 본질적 위험을 깨닫게 된 것이다.

 
▲ 방황하고 있는 고양이 - 어디선가 나타난 새끼 고양이!
ⓒ 커널뉴스 사람과정치 박정원 기자
어제 바리케이드 앞에 모여든 시민들 속에서는 ‘경찰 저지선을 넘는 것은 폭력인가, 저항인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런 교착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토론을 경청하는 입장에서 과연 우리 사회의 ‘집단지성’과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인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목표와 방법은 무엇인지 현장에서 직접 고민해 보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행정부 권력과 국회의 의석 분표, 지방 정부와 의회의 구조, 또한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교육감들의 교육계 권력 구조, 언론의 문제 등에 시민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분명히 시민의 투표로 이루어져 절차적으로 정당하게 선출된 권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난 사람들처럼 두려움을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물론, 과반수를 훨씬 상회한 여당, 의원직 유지 사욕과 지역주의가 결합하여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면 개헌 정족수를 훨씬 넘기게 될 국회의 의석 비율, 지역 기득권들과 어울려 불신 받고 있는 지방 정부와 지방 의회의 기형적 편중 현상에 더하여, 교육감들까지 엄청난 예산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을까? 여기에 불량 언론과 포탈 사이트들의 눈치보기, 정부의 언론 장악 의도까지 겹쳐져 그야말로 총체적인 불신이 팽배해 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부풀어오른 풍선이라 할 정도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토론하는 시민들 - 저지선 앞에 둘러앉아 토론 중인 시민들
ⓒ 커널뉴스 사람과정치 박정원 기자
‘집단지성’을 달리 표현하자면 바로 이 것이 아닐까?
지금 국민은 불같이 토론하고 집단의 의견을 서서히 한 방향으로 모으고 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투쟁해 온 민족이다.
수백 차례의 칩임과 전쟁, 지배 받는 수치와 오욕의 역사 속에서도 한때 대륙을 호령한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국민이고, 작은 국토와 인구지만 문화로 아시아 속에서 크게 자리매김했던 역사적인 자존심을 피 속에 간직하고 있는 민족인 것이다.

내가 오늘날 우리 국민이 위대한 민주주의 역사를 또다시 보여줄 것이라 기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 국민의 높은 역사적 안목과 자존심,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높아진 전체 국민의 평균적인 지적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대사에서 피로 얻은 민주주의가 비록 합법적인 방법의 탈을 쓸지라도 실제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바랄 만큼 우리 국민이 우둔하지 않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 시청앞 광장에의 시민들 - 행사 진행에 맞추어 초를 치켜드는 시민들
ⓒ 커널뉴스 사람과정치 박정원 기자
국민은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라고 노래 부르며 합법적 절차를 갖춘 권력에게 이 의미를 시위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헌법적 절차와 법률적 당위성 들을 들어 국민의 의사와 반하는 정책을 밀어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생각해 보면 바로 시민혁명이 떠오른다.

집단적 지성은 결국 인물을 찾게 되고, 이 인물의 색깔을 통하여 자신들의 서로 다른 이견을 좁히면서 단일한 목표에 동의하게 된다.

누군가가 스스로 자임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의 선택으로 나타나는 여기까지가 ‘집단지성’의 할 일인 것이고, 인물의 부상을 막으려는 더러운 행위가 이어진다 해도 이는 막을 수 없는 필연일 것이다.

정점을 이루는 인물이 나타나면 폭력마저 저항으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 민주주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봉건왕조의 중앙집중적인 권력 강화는 직접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국민의 직접적 의사 표현은 항상 권력구조 변화의 동기가 되어 왔다.
봉건 왕조도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역성 혁명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 인류의 역사인 것이다.

 
▲ 시청앞 광장에의 민주당 의원들 - 재협상 실현과 가축전염병 개정 청원 서명을 받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
ⓒ 커널뉴스 사람과정치 박정원 기자
분명히 입법 발의의 권한을 헌법적으로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길거리에서 국민들의 입법청원 서명을 받고 있어야만 하는 야당, 국회 개원을 한들 정족수 채우기밖에 못할 것으로 비쳐지는 야당, 그렇다고 이마당이 되어도 국회 해산을 말하고 모조리 사표를 던지지도 못할 야당 국회의원들이 허구한 날 길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오늘은 누구누구가 나왔다고 인물 광고나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더듬어보면 봉건 왕조 또한 권력의 누수가 발생하면 중앙 집중적으로 권력을 강화하려 했듯이 국민은 지금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구로 들끓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가 효율의 차원이라면 직접민주주의의 의미는 원칙적 요구라 할 것이다.
국민의 이런 원칙적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부와 의회는 주권자인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의 무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초를 든 시민 - 시청앞 과장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
ⓒ 커널뉴스 사람과정치 박정원 기자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 이런 항시적인 직접민주주의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즈음, 우리 정치권이 이에 부응하는 정당의 의사결정 구조와 정책 입안 과정에의 국민적 요구를 항시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지 못한다면 결국 시민에 의한 정치 혁명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폭력이라 말할 수 있는가?
저항이고 응징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그러나 대의민주주의는 항상 모양을 달리하면서도 언제나 구현되어 옷 것 또한 역사 속에서의 사실임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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