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널뉴스 기사

인사동 '시인학교'가 3번째 문 닫은 사연

강산21 2008. 6. 16. 12:14

원문바로가기 http://www.humanpos.kr/news/article.html?no=942

 

인사동 '시인학교'가 3번째 문 닫은 사연

우리시대의 영혼이 살아 있던 사랑방,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나

간이역, leomail@korea.com

등록일: 2008-06-16 오전 1:53:34

 

1980~90년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가면 문화예술인 즐겨찾는 사랑방이 있었다. ‘평화만들기’ ‘귀천’ ‘시인학교’ 등 문인들은 해가 지고나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랑방을 찾은 것이다. 그 중에 시인들이 사랑을 많이 받은 곳이 주점 ‘시인학교’다. 시인이 ‘시인학교’를 모르면 시인 아니다 라고 말을 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인학교 출입문에 김종삼 시인이 쓴 ‘시인학교’라는 시가 주인보다 먼저 손님들을 환영했다.

公告(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 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김종삼, '시인학교'


이제 김종삼 시인의 ‘시인학교’는 인터넷 검색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점 시인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1984년 서울 인사동에서 문을 연 주점 시인학교는 1987년 정동용씨가 인수받아 20여 년 경영을 하다가 최근에 문을 닫았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문을 닫은 셈이다. 외환위기가 오는 것을 예감 했던지 경영난으로 1996년에 첫 번째로 문을 닫았다. 인사동시대를 접고 가구창고로 쓰던 백마에서 문을 다시 열었다. 그 후에 선후배 시인들이 시인학교는 인사동에 있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여 이듬해 다시 인사동으로 옮겨 왔고, 인사동이 문화지구로 선정되고 나서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2004년에 다시 문을 닫는다.

인사동을 떠나기 싫었던 시인학교 주인장은 인사동 초입에서 포장마차를 열었으나 노점상들이 반발과 더불어 구청에서 몇 번의 수레 압수로 인하여 포장마차를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막노동판으로 떠돌이 신세가 된다. 2년 가까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동료시인들 도움으로 2006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시인학교를 살리자고 많은 시인들이 합심하여 육필시집도 내고 전시회도 열었으나 시인학교를 다시 열만큼의 액수는 아니었다. 결국 동인들의 도움으로 인사동에서 가까운 안국동에서 세 번째 시인학교문을 연 것이다.

이제 인사동엔 시인들의 사랑방은 거의 없는 듯하다. 문민정부시절 술집을 자정까지 밖에 할 수 없을 때도 시인들은 사랑방에 나와 근처 포장마차에서 문학과 예술이야기로 동이틀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에 즐거워했다. 돈이 없어 갈 곳이 없어도 인사동 사랑방에 오면 외상도 주고 동료시인에게 술도 얻어 마시던 곳이 인사동 사랑방이었고 그 대표적인 곳이 시인학교였다.

 
▲ '시인학교'가 문 닫기 얼마 전 시문학회 회원들이 첫모임을 가지고 시낭송회를 열고 있다. 
시인학교는 문학애호가 뿐만아니라 문학지망생까지 북적거렸다. 때론 화가도 있었고 춤꾼도 있었고 소리꾼도 들락거렸다. 한쪽에서는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고 다른 한쪽에서는 춤을 추며 시를 낭송하던 곳이 시인학교였다. 홀로 있어도 많은 시집과 문예지가 있어 외롭지 않고 테이블에 노트가 있어 자진의 생각을 표현 할 수도 있었다.

세 번째 시인학교를 열고 주인장은 오래전 단골이었던 시인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단골이었던 이진우 시인은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갔고 이위발 시인 역시 안동으로 낙향했다. 시인학교 20주년인 2007년에도 그 많던 시인들의 모습은 거의 없었다고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골시인 뿐만아니라 일반 손님도 시인학교를 찾지 않는다. 결국 주인장은 손을 들고 시인학교 문을 닫는다.

인사동 시인학교 시절,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거쳐갔다. 원로시인부터 막 등단한 시인까지 시인학교에 등교하여 출석체크를 했다. 그 인사동 시절을 부활하고자 시인학교는 야심차게 출발한다. 화요문학반을 열어 매주 화요일마다 시낭송을 하거나 강연회를 열었다. 화요문학반은 시인과 더불어 시를 좋아 하는 사람들이 참여를 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인터넷 카페로 열고 정보교류도 했었다. 그러나 다시 문을 닫고 만다.

술집이 문을 닫는 경우는 경영난이거나 개인적 사정에 의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시인학교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세 번 문을 닫았다. 시인학교 주인장은 모든 것을 잃고 추억만 얻었다. 시인학교는 시인들만의 아지트는 아니었다. 시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만으로 공감을 같이 할 수가 있었던 곳이다.

무엇 때문에 시인학교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아야 했었을까. 이 시대는 시인학교와 같은 주점이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이 물음은 시인학교 주인장이 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0년간 수 없는 많은 시인과 손님이 시인학교를 거쳐 갔으니 그만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인학교가 네 번째 문을 열 수 있을 지 혹은 이대로 추억 속으로 달려갈 지 모르는 일이다. 이 또한 주인장이 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희망한다. 다시 시인학교가 문을 열어 사람들 가슴에 한 줄의 시라도 심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간이역의 전체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