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우파, 열린 보수주의자가 지켜온 ‘최소’ ‘겁 많은 자의 용기’는 본래 이문영이 1978년 처음 낸 수필집에 한완상 교수(전 총리)가 붙여준 제목이다. 중요한 고비마다 용기를 내어 쉽게 하지 못할 일에 앞장서곤 했지만, 이문영, 그는 원래 용감하고 호기로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허약하고 얼뜨고 눈이 크고 겁이 많았고 시험지만 보면 떨었다.”(p.52) 중학교는 3수를 해서 여덟 번 낙방하고 아홉 번 만에 간신히 들어갔다. 타고난 카리스마로 다른 이들을 통솔할 재주는 더욱 없어서, “전체교수 회의 때 벌벌 떨면서 발언했지만, 발언하고 나와서 내 발언을 동료 교수들에게 다시 말하거나 내 발언에 동의와 지지를 구하지 않고 곧바로 내 연구실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었다.”(p.62)
하지만 어떤 한마디가 꼭 필요할 때, 바로 그 필요한 한마디를 용기 내어 “벌벌 떨면서” 하는 사람이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탄압하고자 박정희 정권의 군대가 고려대 교정에 난입했을 때에 그는 본관 앞에서 항의문을 낭독했다.
이 성명서를 기초한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정한숙 ·민병기 ·김치규 ·이문영 넷이었다. 성명서 작성자가 네 명이나 되는데 막상 낭독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창세기〉 3장 9절에서 아담을 향하여 한 야훼가 한 말인 “너 지금 어디 있느냐?”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너 어디 있느냐?”가 내 생에서 의미 있는 물음으로 보아, 이 책의 서문 제목을 “너 어디 있느냐?”로 잡았다. 내가 항의문을 낭독할 때 사람들이 잔뜩 모였는데, 이때 항의문을 초안한 자가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나는 이때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본관 현관 앞 돌계단 위에 서서 시계탑이 내려다보며 항의문을 읽었다. (중략)
만일 내가 이때에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그래서 그때 성명서를 읽기 위하여 안 나섰더라면 그 후에 나를 필요로 했던 야훼가 나를 향하여 ‘너 어디 있었느냐’라고 계속 물으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교수로서 야훼가 내리신 명을 받아 이를 따르려고 애써왔다.---p.148-150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바르게 대답하는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다.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내내 그는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지식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있었다. 1987년에는 현민 빈소 사건을 일으켜 학계의 패륜아로 매도되기도 했다. 현민 유진오는 전 고려대 총장이었다.
1987년 9월 3일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유진오 총장의 사회장 장례식이 있었다. (중략) 현민의 부고를 접한 날 아침, 나는 집사람과 부의금 액수를 의논했다. 나는 바로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가고자 했으나 그날은 고려대 연구실에 볼 일이 있었다. 그래서 고려대 교문을 들어서는데 교문에 현민 빈소라는 푯말이 붙은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나는 곧 연구실로 가서 “고려대학이 〔전두환의〕 국정 자문위원의 빈소일 수 없다”라고 쓴 피켓을 만들었다. 이 피켓 만드는 모습을 몇몇 교수들이 지켜봤다. 나는 이것을 교문 앞에 가지고 나와 들고 서 있었다. 그날 밤에 피켓을 내 연구실에 갖다두려고 건물 계단을 올라가다가 윤용 교수를 만났다. 그 첫날 이후 나는 아예 집에 안 갈 작정을 했다. 집에 가면 다시는 피켓을 들려고 집을 나서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날은 윤용 교수네에서 잤다. 그 다음날, 윤용, 이상신, 권창은, 이만우 네 분 교수가 나와 합류해 교문 앞에 섰다. 그러자 교내 동료 교수 249명이 우리를 패륜아로 매도하는 성명서를 냈고 교우회 간부들이 총장을 찾아가 우리의 파면을 요구했다.
여름방학 중이었던 캠퍼스에 갑자기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학생들이 빈소에 들어가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부수고, 피켓을 들고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피켓은 유진오 총장이 일제 강점 때 친일파였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의 이 데모가 있은 다음에야 빈소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갔다. (중략) 유진오 총장은 나에게 일제 강점 때 주권재민의 헌법만이 현대 헌법이라는 가르침을 준 스승이었다. 내가 유학하고 귀국했을 때는 나를 전임강사로 발령을 내준 총장이었다. 그러니까 이분은 나의 웃어른이었다. 그러니 이 윗분에 대한 나의 불손을 249명 동료 교수가 비난할 만했고 교우회가 나를 파면하라고 학교 당국에 독촉할 만했다. 같은 학과에 있던 제자 교수가 내 연구실에 찾아와 항의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지금도 가슴 아프다. 그러나 네 말을 들은 뒤에 같은 일을 당하면 나는 같은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현민 빈소 사건 후 근 20년이 지난 오늘, 현민을 평가하는 눈과 고려대가 달라진 것을 나는 본다. 지금은 현민에 대한 평가가 전두환의 국정에 자문한 사람이라기보다 일제 때 학병 출정을 독려한 친일파라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독재자의 국정을 자문한 것을 더 나쁘게 생각한다. 거듭 말해서,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말년에 자신의 행위를 고치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p.474-481
겁 많은 자에게서 그러한 용기를 끌어낸 것은 무엇일까. 일제 치하이던 어린 시절, 무교동 성결교회의 어린이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장남으로서 횡포를 부려 동생들을 때린 것을 뉘우쳐서 울었고, 배재학교의 예배 시간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듣고서 이제부터는 공부를 잘하되 나라를 위하여 기독교의 틀 안에서 하자고 결심했고, 종로경찰서 형사가 실직 중이던 아버지에게 찾아와 왜 창씨개명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창씨개명 하라고 어디 법에 있습니까” 한마디 하고 입을 다물던 아버지의 의연한 태도에 감동했다. 이 세 가지 경험은 이문영의 삶에 주어진 은총이었고, 이 은총을 여든한 살이 되도록 어떻게 간직했는가를 쓴 것이 바로 이 책, 《겁 많은 자의 용기―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문영이 스스로 ‘지켜야 할 최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첫째, 동생을 때리지 않겠다는 결심, 곧 ‘비폭력’이다.
돌이켜보니 나에게 명(命)이 되었던 인(仁)은, 지켜나갈 순서로 봐서, 먼저 동생들을 형이라고 해서 때리지 않는 일이었으며, 다음으로는 공부를 잘하되 나라를 위하여 기독교의 틀 안에서 하는 일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악한 통치자에게 저항하되 내 아버지같이 의연하게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나에게 명을 내린 장소는 교회와 배재학교와 우리 집이었다.---p.109
비폭력은 비폭력만으로 멈추지 않고 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으로 그 덕목을 첨가해 나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이다.---p.65
그러나 3 ·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추운 겨울 어느 한밤중에는 ‘더운물 한 모금’이 바로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였다. 3 ·1민주구국선언 사건은 1976년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지 1년이 가까워 오는 삼일절에, 3 ·1운동 60주년을 맞아, 명동성당에서, 김대중 ·문동환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윤반웅 ·윤보선 ·이문영 ·이우정 ·정일형 ·함석헌이 유신 헌법 폐지를 주장하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한 사건이다.
나는 습관대로 추운 겨울날 어느 저녁에 심호흡과 요가를 했다. 몸에 땀이 흠뻑 났다. 나는 냉수마찰을 하고 나서 자리를 깔고 취침을 했다. 밤중에 잠이 깨더니 갈증이 났다. 그래서 저녁에 받아둔 물을 마셨다.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복도로 난 문을 똑똑 두드렸다. 교도관이 왔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달라고 말했다. 그는 더운물이 없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가 왔다. “만일 댁에서 지금 물을 마시고 싶다면 어떻게 하세요?” “저 난로에서 끓여 마시지요.” “그러면 저에게도 난로에서 끓여 주세요.” “안 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내가 더운물을 못 얻어 마시는 것은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며 갈릴리 교회에서 성찬을 함께 한 동료들도 나처럼 찬물을 마시고 덜덜 떨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더운 물 한 모금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라고 생각했다.
생각 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교도관이 안 왔다. 그러자 나는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교도관이 달려왔다. 다시 더운물을 달라고 말했다. 물을 안 주겠단다. 그러면 더운물을 달라는 청원을 교도소장에게 하겠으니 교도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알았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식사를 안 하기도 했고 못하기도 했다. 낮이 되자 근무자에게 교도소장을 불러달라고 계속 말했다. 교도소장이 안 왔다. 교도소장이 높은 사람이어서 안 오는 것이 괘씸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소장에게 처우 개선에 관하여 청원서를 내고자 하니 필기도구를 달라고 말했다. 교도관이 갖다 주지 않았다. 만일 필기도구를 줘서 내가 청원서를 제출한다 해도 소장이 묵살해버리면 그만이며, 아예 소장에게 제출되지도 않고 서류가 중간에 증발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요구는 한 가지 더 늘고 좀 더 견고해졌다. 나에게 청원서를 쓸 필기구를 주고 이 청원서를 소장에게 내용증명으로 송부한 청원서 사본을 내 손에 쥐어줄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 사흘을 단식했다. 이 단식이 내가 일생에서 처음 한 단식이었다. 그 후에도 세 번에 걸쳐 4년 10개월을 한 옥중 생활 중에 단식을 종종 했는데, 단식은 건강할 때 해야 한다. 단식 처음 단계에서는 오만 가지 음식 생각이 나지만 차차 나아지고 뱃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을수록 오히려 손끝까지 생기가 생기는 것이 단식이다.
교도관이 청원서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니 그 대신에 변호사를 만나서 얘기하고 단식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변호사와, 그와 동행해 온 교회협의회의 김상근 목사를 만났다. 나는 원래 여섯 자리 전화번호도 잘 못 외우는 사람이었는데, 열여덟 가지 양심범 처우 개선안을 쭉 말했다. 내 말을 김상근 목사가 꼼꼼하게 적었다. 김상근 목사가 적은 이 메모가 그대로 외신에 보도되었고 국내 보도에는 안 나왔다. 이 보도가 나오자 비로소 양심범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었다.---p.302-304
지켜야 할 최소를 지킨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을 버리는 일은 자신을 타락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택한 방법은, 그의 아버지가 종로경찰서의 형사에게 그러했듯이,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할 말로 싸우는 것이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장 재직 시절) 학교에 《고대신문》이 있었건만 지하 신문 《민우지(民友紙)》가 나왔다. 검열되는 《고대신문》에 뭘 못 쓰니 이런 짓을 한 고려대생들과, 노동문제연구소의 김낙중 씨와 노중선 씨를 잡아갔다. 이 일을 진짜 이들이 했는지 안 했는지를 나는 지금까지도 확인하지 않고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연구소 이사 가운데 한 분인 김진웅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김과 노 두 사람에게 봉급을 주지 말라고 한다는 말을 나에게 전했다. 나는 이 문제를 의논하고자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사회에 김 교수만 참석했다. 나는 “아직 이들이 재판 중이고,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되는 것이 현행법이니 봉급을 안 줄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일제 때 아버지께서 형사에게 하신 말씀과 닮은꼴이었다. 내 경우 박정희의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후에 내가 한, 행동하는 말 가운데 첫 말이었다. 나는 이렇게 내 아버지 덕으로 쉽게 비폭력 투쟁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중략)
며칠 후 나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불려갔다.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무례한 조사관 사이에 오갔다.
그: 뭐? 무죄로 추정되니까 봉급을 준다고? 두 직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 사상이 나쁜 것을 말이다. 나: 사상이 나쁜 것을 알아내는 것은 중앙정보부 여러분의 의무인데 왜 나에게 묻습니까? 그: 소장으로 책임을 안 느끼나? 나: 안 느낍니다.
이상의 논리로 봐서 나는 저쪽의 사과라도 받고서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교수가 만년필도 안 갖고 다니느냐는 야단을 맞아가면서 자필로 연구소장직이 아니라 교수직 사직서를 쓰고 나왔다. 나는 이때 이후로 열여섯 번 더 끌려갔는데, 이때가 제일 무서웠다.---p.256-258
4.3평짜리 2층 독방에서 잘 지내면서 나는 교도소 당국에 “내가 동일 사건자 중 서울에서 제일 먼 데에 있어, 집사람이 면회 왔다가 통행금지가 있는 하루 만에 집에 되돌아가기가 힘이 드니 집사람을 교도소에서 자고 가게 해달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도관이 “박사님은 꼭 행형법에 있는 것만을 요구하셨는데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 대답에 나는 “행형법에 부인을 재워 보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나를 멀리 보낸 것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고, 나만 가둬놓으면 되지 집사람을 학대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면회하고 밖에 나온 집사람이 같은 사건 가족들에게 이 얘기를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서울구치소에서 행형 제도를 갖고서 까다롭게 대해, 미움을 받아 서울에서 멀리 보내진 것에 대하여 구속 가족들이 신나게 웃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차피 이 사건은 우리에게 축제였다. 지금도 그 가족들이 나를 보면 부인을 교도소에서 자고 가게 해 달라고 했던 사람이라며 웃는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던 집사람이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p.306
옥고는 그의 학문을 더 깊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인간이 일을 하는 방법을 세우는 사회과학’인 행정학에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인 인문학을 접목시켜야 한다는 20대부터의 생각을 더욱 깊이 하게 되었다. (첫 번째 옥고 때) 한번은 이렇게 잠을 깨는데 웃으면서 잠을 깨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순간 벽 쪽으로 향하여 누우면서 웃었다. 왜냐하면 밖의 복도를 걸으면서 시찰구로 나를 들여다볼 교도관이 내가 밤중에 웃는 것을 보면 이문영 교수가 실성했다고 상부에 보고할 것이 귀찮아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교도관은 뭐든지 보고하는 눈치였다. 나는 벽을 향하여 돌아누우면서 내가 왜 웃는가를 생각했다. 이때 내가 생각한 것은 인간의 기쁨에는 두 계통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 계통의 기쁨은 좋지 않은 환경과 부족한 물질에서 연유하는 불만 요인이 해소될 때에 생기는 기쁨이며, 다른 한 계통의 기쁨은 환경과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의 내면과 정신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전자의 기쁨은 불만―내 경우 먹는 것이라든지 춥다든지 하는 것―을 해소하는 효과를 지녀,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불만 해소’에 불과하다. 후자의 기쁨은 인간의 참여와, 고난과 역경의 도전을 극복하는 보람에서 생기는 일을 이룩하는 효과를 가져, 이름을 붙인다면 ‘만족 충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만 해소와 만족 충족은 일직선상에 놓이는 감정이 아니다. 즉 사람에게서 불만이 해소되었다고 자동적으로 만족이 충족되는 것도 아니며, 만족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불만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중략)
교도소 생활을 한 후에 내 학문의 접근 방법이 고전이라는 인문학을 접목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는데,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인 인문학은 사람이란 불만 해소 정도가 아니라, 아니 불만 해소가 안 되더라도 만족 충족을 지향하는 고귀한 존재임을 밝히는 학문인 것을 교도소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발견은, 불만 해소가 안 될수록 오히려 만족 충족의 기쁨이 증폭한다는 점이다.---p.300-301
그런데 그가 정말 작아진 것은 세 번째 옥고 때였다. 첫 옥고를 겪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옥고 때는 기가 죽었다. YH 노동자 김경숙이 죽었고 나는 기껏해야 옥고였던 것이다.---p.425
첫 번째 옥고는 기쁨을, 두 번째 옥고는 슬픔을 주었다. 세 번째 옥고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내가 죽을 뻔한 데서 나왔고, 우리가 실패해 군인 정권이 계속 이어졌으니, 내가 어찌 나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두 번째 옥고에서 얻은 깨달음은 자기 체제 내의 분열을 자초하는 적을 아는 것이었다면, 세 번째 옥고에서는 우리를 알게 되었다.
우선 나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나는 내 계산대로 승리하고 나온 사람이라기보다 조서에 하지도 않은 내란을 음모했다고 손도장을 찍고 살아남은 자이다. 이 손도장은 나를 죽게 하는 손도장이기도 했지만, 잘못하면 잡혀온 이들의 우두머리인 김대중을 죽이는 손도장이었다. 예수는 죽음을 맞이한 날 한 설교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면서, 서로 사랑하는 예로 친구를 위해 죽는 것이 있다고 말했는데, 내 경우는 친구를 죽이고 나는 살겠다는 수작을 한 것이었다. 나는 왜 예수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로써 이를테면 적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말을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함석헌 선생님의 제자들이 왜 선생님의 시 〈너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애송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적을 사랑하는 것보다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p.374-375
최소주의자인 그는 좌파나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검약과 근면으로 모은 사유재산이 신성하다고 믿으며, 집집마다 명상할 수 있는 정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청교도적인 자본주의자이며, 좌파를 포용하려 하는 우파다. 나는 마치 남자가 예쁜 여자를 골똘하게 생각하듯이 재물을 골똘하게 생각했다. (중략) 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에는 바닷가 길과 바다 사이에 있는 대지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열심히 했다. 감방 안의 냄새와 부자유함이 너무나 싫어서 햇빛과 오존과 넓은 공간의 바닷가를 나는 환장하도록 꿈꾸었다.---p.215-216
집이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뜰에 앉아서 하느님을 명상하는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세계를 다니며 아름답게 본 곳이 두 곳인데, 하나는 미국에 있는 내 동생 인영의 집 뜰이다. 집집의 뜰이 연이어진 넓은 공간을 나는 아름답게 보았다. 집집마다 명상하는 정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내 정치적 입장이기에, 나는 좌우 정책 스펙트럼 중심부에서 약간 우 쪽에 기운 보수주의자이다. 만인의 명상을 믿는 나는 좌단이 아니며, 약자를 편드니 우단은 아니다.---p.500
우리나라도 지금은 1980년대보다는 자유 천지니까 우리에게는 으레 좌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또 좌파가 있지 않으면 민주국가도 아니다. 거듭 말해서, 유럽 정치에선 좌파가 극우 세력보다는 더 정당성을 가졌다.---p.575
기독교인인 그는 이 책의 1부 제목을 ‘나에게 주어진 은총’이라 했다. 1부 1장의 제목은 ‘괴로움과 슬픔’이다. 자신이라는 인간을 만든 은총 중 첫 번째가 ‘괴로움과 슬픔’이라는 것이다. 그 1장의 첫 번째 이야기가 부인 김석중을 만난 사연이다. 괴로움과 슬픔을 아는 ‘깊은 데 있는’ 여자라서, 사모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도 괴로움과 슬픔을 아는 이들을 편든다고 생각한다.
야훼가 아벨을 카인보다 더 귀엽게 여긴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제물의 차이에서 야훼의 선호가 결정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재준 목사마저 〈창세기〉 연구에서 이를 하느님의 신비에 돌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이유가 있다. 야훼가 아벨을 선호한 것은 아벨이 한 통치 체제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자, 야훼가 눈여겨보고 키워낸 둘째 아들들을 열거해보자. 우선 아브라함이 있는데,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나온 사람이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고 도의적으로 문제가 많은 둘째 아들이었다. 요셉은 열 명이나 되는 형들의 시기를 받은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성장한 이민족 유대인이었다. 그 후에 나온 수많은 선지자들은 다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로마 법정에서 사형 집행을 받았다. 예수가 비유로 든 탕자도 둘째 아들이었다. 이 둘째 아들도 야곱 비슷하게 개인윤리 면에서 틀린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야훼께서는 둘째 아들을 이렇게 편들었는가? 이는 야훼는 그냥 신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말하자면 이집트에서 둘째 아들이었던 유대 백성을 긍휼히 여긴 하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분명히 성서가 적지 않고 신비롭게 둔 것은 분명하게 적어놓으면 악한 통치자인 큰아들에 의해 성서가 금서가 되기 때문이다.---p.598-599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는 괴로움과 슬픔을 외면한다고 판단되어, 그는 아프다. 이 모든 부조리의 책임을 나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찾는다. 아니, 내 교회에서 찾는다. 몸 한 곳에 암이 있어도 몸 전체가 병이 든다. 내 교회가 이렇다고 해서 다른 교회에 가지는 않는다. 다른 데 가도 비슷하다고 본다. 그리고 설혹 다른 데, 좋은 데가 있다 하더라도 나쁜 데가 나를 필요로 하는 데이다. 따라서 내 교회를 만악의 뿌리라고 내가 지목하는 이유가 있다. 이는 우선 인간의 심층을 지배하는 교육 장소가 교회이기 때문이다.---p.554
나의 이 고집 같은 기다림을 탓하지 말기를. 기다림은 나의 길이다. 나의 의무다. 나의 숨쉼이다. 배선표 목사님 같은 공회의 장이 계셨기에 나는 장남임을 행세해 동생들 때린 것을 뉘우쳐 이 교회에서 울었다. 이 울음은 지금까지 나를 울게 하는 울음의 샘이다. 교회가 사유화하고 있는 것, 이 때문에 나라가 썩는 것을 아파해 그 후에도 계속 울었고, 지금도 울고 있다.---p.668
그는 교회가 깨어 악을 바로잡고, 새 문명을 일굴 날을 기다린다. 새 문명을 이야기한 예로 나는 제정러시아 말기에 새 문명을 내다보고 톨스토이가 쓴 글인 〈바보 이반〉을 꼽는다. 이 글은 새 나라에서는 금화가 있어도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있고, 군대도 있기는 한데 군악대용으로만 있다는 내용이다. (중략) 광화문 대궐 문 앞에 박정희 때처럼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서 있지 않고 탱크가 있던 자리에 조선군 복식을 한 수문장이 서 있는 나라가 된 것을 나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군인들이 행진할 때 나오는 주악도 조선조 군대가 진군할 때 연주된 ‘대취타’ 정도가 되면, 비록 바보 이반의 꿈처럼 군대가 없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좀 더 신문명다워진다고 나는 생각한다.---p.674
그는 책을 쓰다가 생의 마지막을 맞고 싶다. 행정학자로서 그가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책은 《새 문명에서의 공직자》이다. 새 문명에서 ‘공직자’는 백성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 대통령은 국민의 일자리를 만드는 이가 아니라 국민을 정직하게 만드는 이여야 한다. 목사는 교인들에게서 돈을 거두는 이가 아니라 교인들이 죄를 안 짓도록 돕는 이여야 한다.---p.485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이가 공직자이지, 이밥과 고깃국 먹이며 일자리 만든다고 말하는 이가 공직자가 아니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백성들이 그들의 죄에서 구원받으면 스스로 해결되는 문제이다.---p.679
하긴, 공직자가 공정하지 않고 부패하고 권위적이면 생계를 영위하고자 백성들이 편법을 쓰고 뇌물을 바치고 사기를 친다. 기회가 균등하여, 정직하게 일하기만 하면 생계와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 누구나 자기 집에 명상할 수 있는 정원을 꾸며놓을 수 있는 사회. 이것이 그가 꿈꾸는 새 문명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