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 재·보선 참패로 폭발한 열린우리당의 통합신당론이 당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천정배 의원과 정동영 전 의장, 김근태 의장 등이 통합신당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으며 많은 의원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당 창당 주역의 한 사람인 신기남 의원과 친노그룹 등은 지역주의로의 회귀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어 오는 11월 2일 열릴 의원총회에서 신당 창당을 둘러싸고 난상토론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은 창당 직후 실시된 2004년 총선을 제외하고 모든 재·보선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그 때마다 선거패배의 원인을 개혁의 실패와 민심이반을 들며 대통령 탈당과 민주당과의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지도부 사퇴 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당을 수습하며 조기전당대회 실시 등을 통해 당 쇄신을 모색했다.
10·25 재보선 후에도 역시 지도력 부재를 문제 삼아 조기전당대회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내년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전당대회는 곧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제기되자 급기야 그동안 물밑에서 끓어오르던 신당론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게 됐다.
선거패배 이후 쏟아지는 당 쇄신 요구, 이에 강력히 반발하는 구주류측, 그리고 신당창당론. 이 과정은 우리당 창당 전 새천년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도 반복해서 일어나던 일이다.
“지역주의 극복·정당개혁·아래로부터의 공천” 주장하며 2003년 민주당 신주류 부상
2003년 초부터 민주당 내에는 당 개혁을 요구하는 인사들이 ‘신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갖고 있는 민주당을 전국정당으로 만들어 우리나라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지구당 폐지·당대표 직선 등 정당개혁을 이루며, 아래로부터의 공천을 통해 깨끗한 정치문화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신주류 인사들은 당 개혁 작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으며, 이에 앞장선 인사들이 열린우리당 창당주역으로 일컬어지는 천정배·정동영·신기남 의원이다. 이들의 요구에 민주당 구주류의 핵심인 한화갑 당시 대표는 “신주류의 당 쇄신안은 당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반격했다.
대선 승리 후 처음 치러진 4·24 재·보선 공천을 놓고 민주당의 신주류와 구주류가 본격적으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신주류는 개혁당과 연합후보를 낼 것을 주장했지만, 구주류는 민주당 후보의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재·보선 결과 민주당은 개혁당과 연합공천 후보를 냈던 고양시 덕양갑만 간신히 건졌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전패했으며 심지어 민주당의 텃밭인 전남 진도의 도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에게 낙선했다. 공주와 거제는 자민련·민노당에도 밀린 3, 4위를 각각 기록했다.
재·보선 참패로 민주당 구주류의 공천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신주류의 개혁안이 본격적으로 힘을 받기 시작했다. 신주류는 천·신·정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운 신당추진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정치생명을 걸고 정치개혁을 이루겠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결집한 천·신·정은 당내 소장파 의원 19명과 함께 4월 29일 당내 신당추진위를 구성할 것을 합의했으며, 민주당 당무회의에 신당추진방안을 상정했다. 이어 5월 민주당 의원 54명이 참여한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을 발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자리에서 천정배 의원은 발제를 통해 “신당은 정치인과 일반 국민이 동등한 자격으로 발기인에 참여해 대표를 뽑는 국민참여 정당”이라고 신당의 성격을 규정했다.
구주류의 중심인 한화갑 의원은 “신당은 노무현당이며 3류정치의 전형이고, 패거리정치”라고 맹비난하며 신주류와의 갈등을 한층 심화시켰다.
신-구주류 갈등은 공식회의를 ‘무법천지 난투극’으로
이후 민주당의 신-구 주류간의 갈등은 공식회의 석상에서 욕설을 퍼붓고 멱살잡이를 하며 난투극을 벌이는 ‘무법천지’로 치닫게 된다.
5월 30일 신당문제로 첫 격돌한 민주당 당무회의는 4시간 동안 고성과 인신공격성 발언, 욕설이 오가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6월 중순에는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구주류 측 당원 30여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신주류 측과 멱살잡이를 하는 등 폭력상황이 벌어졌다. 신주류 측의 어떤 의원 보좌관은 신주류의 한 의원과 같은 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리채를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8월 중순 열린 당무회의에서는 구주류측 여성당원이 하이힐을 벗어 행사를 진행하던 신주류측 당원의 머리를 내려치는 등 그 어느때보다 극심한 몸싸움을 벌였으며, 28일 당무회의에서는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육탄전과 욕설, 멱살잡이를 하면서 난장판 회의를 연출했다.
신당을 위한 마지막 당무회의인 9월 5일은 신-구주류 싸움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언론이 ‘난투극’이라 표현할 정도로 욕설과 몸싸움을 벌인 무법천지였다.
회의 시작 직후 구주류 측은 회의장에 생수통의 물을 뿌리고 정대철 대표와 김원기 고문 등 신당측 원로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등 육탄전을 벌였으며, “죽여!” “밟아버려”라는 험한 말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
급기야 구주류측 여성당직자가 신주류의 이미경의원에게 달려들어 “한나라당에서 오며 당엔 100원짜리 한 장도 안 낸 사람”이라며 목걸이와 머리채를 잡아당기면서 신·구주류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됐다.
이 사건후 분당을 반대해왔던 김근태 의원이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사망했다”며 3일간 단식농성을 하고 신당에 합류하게 됐으며, 신당에 참여하는 의원들이 속속 늘어나게 됐다.
신당은 한나라당 탈당의원과 개혁당 의원들을 합류시키고,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했다.
원내 47석의 소수당에서 출발한 열린우리당은 2004년 탄핵사태를 겪으며 150여석을 가진 제1당이 되고, 이어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입당, 여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중도개혁 열린우리당+보수 민주·고건’으로 정치개혁 완수할 수 있을까
100년 정당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열린우리당은 3년만에 다시 신당을 만들겠다고 천명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이라는 간판을 내던지고 분열돼 있는 범여권 세력을 결합해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고건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범 여권의 결합이라는 열린우리당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주당 분당 당시처럼 일부 신당파가 탈당해 이들과 세를 모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총체적인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집권여당이라 해도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당을 쪼개면서 세를 축소시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에서 주장하는 제3지대에 헤쳐모이는 방법은 당을 해산했을 때 비례대표 의석이 사라지고, 정부의 정당보조금 문제도 걸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은 우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고건신당이 당대당 통합을 하는 것이다. 민주당과 고건 전 총리 측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비례대표 의석을 지키고 정당보조금 문제도 해결하면서 지지층 이탈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연합정당’ 형태로 통합신당이 탄생한다면, 이념의 스펙트럼은 현재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더 넓어질 것이 분명하다.
천정배 의원은 29일 신당창당 기자회견 당시 “우리당과 민주당의 정책에 차이는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북핵 문제로 드러난 민주당과의 정책 차이는 분명하다. 민주당은 햇볕정책 고수를 주장하면서도 대북강경책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건 전 총리 역시 대북강경책을 강조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나 PSI 확대참여 문제 등에서도 민주당과 고 전 총리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각종 민생법안에 있어서도 민주당과 고 전 총리는 한나라당과 같은 의견을 내고 있다. 한나라당이 한민공조를 주장하며 “민주당과는 지역기반이 다를 뿐”이라며 이념적인 동지라고 강조했던 점이나, 고 전 총리를 향해 “한나라당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추켜세웠던 점은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민주당·고 전 총리와 중도·개혁을 표방하는 열린우리당이 연합해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완수할 수 있을까. 우리당의 신당창당론에 정가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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