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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장애딛고 재기의 꿈 다지는 ‘카스바의 연인’ 윤희상

강산21 2006. 2. 17. 23:52
전신마비 장애딛고 재기의 꿈 다지는 ‘카스바의 연인’ 윤희상
[레이디경향 2006-02-17 02:12]
자살까지 생각했던 1년 3개월의 악몽 같은 투병기 & 아내의 눈물 어린 간병기
 

‘카스바의 연인’으로 성인가요 최고의 가수로 손꼽히던 윤희상이 어느 날 갑자기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그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다가 잠깐의 졸음 운전으로 깊고 깊은 절망의 늪에 빠졌다. 악몽 같던 투병기를 거쳐 이제 희망의 줄을 낚아챈 윤희상과 부인 이인혜씨의 감동 부부 인터뷰.

“만약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나머지 인생은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마이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재활 훈련용 보조 기구에 몸을 의지해 어렵사리 일어선 윤희상은 아내에게 자신의 히트곡 ‘카스바의 연인’을 틀어달라고 하더니 지그시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가 섰던 그 어떤 무대보다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렇게 다시 마이크를 잡기까지 윤희상은 무려 1년 3개월이라는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건너와야만 했다.

 

전신 마비 사실 알고 오직 죽음만 떠올려

 

엘리베이터가 열리기 무섭게 현관문을 열어주던 아내 이인혜씨는 금세 남편에게 달려가 신발을 신겨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라 목욕을 하고 머리도 손질하고 사진 잘 받는 옷까지 챙겨 입느라 무려 2시간이나 준비했다는 말로 윤희상이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를 위해 햇빛이 잘 드는 창가로 자리를 옮기기 전, 그는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단장을 마쳤다.

 

멋쟁이 트로트 가수를 주저앉힌 사건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난 2004년 9월 29일, 공연을 위해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던 윤희상의 승용차가 앞서가던 4.5톤 트럭의 화물 적재함을 들이받았다. 사고나기 한달전 운전기사가 그만두는 바람에 직접 운전대를 잡은 그가 연이은 공연 스케줄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졸음 운전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의 충격으로 윤희상은 사고 전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을 아직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당시 그는 ‘카스바의 연인’에 이어 ‘텍사스 룸바’로 성인가요 인기차트 1위를 휩쓸며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가장 먼저 이가 뭉텅 빠지고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노래 부르는 가수가 이가 빠졌으니 정말 큰일이다, 빨리 이부터 해 넣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어서 치과에 데려다 달라고 호통을 쳤어요.”

 

자신이 얼마나 위중한 상태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그는 사전에 잡혀 있는 방송 스케줄 걱정만 했다. 한 번 펑크를 내면 출연정지 조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서 일어나 방송국으로 달려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런 윤희상이 “왜 몸이 말을 듣지 않느냐”고 재차 물을 때마다 그의 부인 이인혜씨는 안정을 위해 팔다리를 묶어놨기 때문에 감각이 없을 거라고 둘러댔다. 아내가 윤희상에게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한 것은 그때만 해도 곧 좋아지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열흘 후, 한 차례 큰 수술을 마친 뒤에 윤희상은 콧대와 광대뼈가 함몰되고, 목뼈가 골절됐을 뿐만 아니라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뚫고 나가는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전신 마비로 인해 다시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죽어야겠다 싶었어요. 멀쩡한 사람이 한순간에 그 지경에 이르면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데 자살조차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정말 미치겠더군요. 문병 온 후배에게 이대로는 못 살겠으니, 독약을 좀 구해오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했어요.”

 

몸은 움직일 수 없어도 정신은 온전한 그는 병상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돈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기본 보험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비 부담이 엄청난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또한 간호에 매달리느라 아내가 운영하던 의류 사업까지 접었으니 생활비 걱정도 만만치 않았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그의 곁을 지키는 아내를 볼 때마다 “이 한 몸 없어지면, 저 사람이 정말 편해질 텐데…”라는 혼잣말을 되뇌곤 했다.

 

윤희상이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건, 선후배 트로트 가수들의 정성 덕분이다. 대선배 나훈아가 병실까지 찾아와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고 격려를 하며 1천만원이라는 큰돈을 건넸다. 송대관, 태진아, 현숙, 한혜진, 김혜연 등 동료들과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 송해, 방송국 PD 그리고 이름 모를 후배들까지 십시일반으로 그의 회복을 빌며 희망을 실어주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에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죽을 생각만 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그분들께 보답하는 길은 다시 일어서는 것뿐이라고 각오를 다지고 나니 더 이상 몹쓸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1년 만에 휠체어를 타고 다시 무대에 서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의지로 마음을 다잡자 회복세가 빨라졌다. 사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발가락과 손가락 끝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는 ‘아직은 이르다’는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재활 훈련을 시작했다. 3개월 정도 지나니 발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발을 무대로 내디뎌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솟아났다. 사고 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정상인 수준이라는 폐활량 검사 결과는 그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경추 5, 6번을 다치면 음감이 무뎌져서 고음처리가 안 되기 때문에 가수 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는 제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만 같았어요.”

 

1년여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틈틈이 인적이 드문 병원 뒷마당에서 발성 연습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전성기 때의 감을 잡아갔다. 속상한 마음에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가요 프로그램을 다시 켜놓고 동료들의 노래를 꼼꼼히 들으며 모니터도 했다.

 

“노래는 제게 마약과도 같아요. 또한 제 희망이자, 삶의 목적이었어요. 육체적인 고통은 자기 최면을 걸어서 이겨낼 수 있었지만, 노래를 다시 못하게 된다는 상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사고가 난 지 꼭 1년째 되던 날, 기적처럼 i-TV 경인방송 ‘성인가요 베스트 30’ 제작진으로부터 출연 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리허설만이라도 좋으니 다시금 무대를 밟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탓이다.

 

“신기한 게, 일단 무대에 오르니까 노래가 술술 나오는 거예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망치지는 않았어요. 방송이 나간 이후에 시청자들의 격려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제 노래를 들으면서 울었다는 분도 있었어요.”

 

사고 후의 첫 출연에 대한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그는 2주 연속 무대에 설 수 있었고 두 번째 공연에서는 한결 노래가 나아졌다.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동료 가수들은 사고 전과 다름없다며 그의 뜻 깊은 컴백을 축하해 주었다.

 

“방송 출연 이후 용기를 얻어서 매년 들렀던 교도소 재소자 위문공연도 다녀왔어요. 사고를 당했던 그 길을 다시 달려가 목포까지 이르는 여정은 힘겨웠지만, 다른 어떤 가수보다도 큰 성원과 격려를 받았어요. 그분들을 위문하러 간 게 아니라, 제가 위안을 받고 온 기분이었어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기만 한 아내

 

사진 촬영을 위해 윤희상을 휠체어에서 소파로 옮긴 뒤, 이인혜씨는 “그렇게 앉아 있으니 멀쩡해 보인다”며 활짝 웃었다. 서대문구 홍제동의 호젓한 빌라에 살던 부부는 휠체어로 오르내리기 불편한 그 집을 급히 처분하고, 지금의 은평구 증산동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상암동 월드컵 주경기장까지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전망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남편을 위해 아내가 마련한 선물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엔 정말 경치가 근사합니다. 어쩌다 아내가 집을 비울 때면 하루 종일 창 밖을 바라보는데,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달리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느꼈어요.”

 

윤희상이 갑자기 담배를 찾았다. 재활 훈련으로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움직임이 더딘 손가락으로 그는 라이터를 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인혜씨가 “나쁜 건 꼭 빨리 배운다”며 면박을 주자 그도 “가슴 답답할 때는 이게 최고”라며 지지 않고 응수한다. 남편은 하루 몇 대 안 태우는 담배이니 꽁초가 될 때까지 피우겠다고 고집하고, 아내는 건강에 나쁘다고 말리며 한참을 실랑이 한다.

 

마치 연인들의 사랑싸움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니 이들에게 언제 먹구름이 드리웠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부부의 집에는 두 사람의 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흔적이 여러가지 엿보인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윤희상의 사진 외에 부부가 여행 가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제법 여러 장 커다랗게 확대되어 집 안 곳곳에 걸려있다. 거실의 장식장까지 점령해버린 부부의 다정한 사진 사이로 일본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세계적인 업체에 입사한 딸의 사진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애할 때는 집사람이 나를 더 좋아했어요. 내 얼굴이 보고 싶다고 약속도 안했는데 우리 사무실 아래 다방에서 기다리곤 했어요.”

 

기분이 좋아진 윤희상이 불쑥 옛날 얘기를 꺼내고는 “내 말이 맞지?”라며 확인까지 하려 든다. “그때는 영화배우 해도 되겠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며 남편 편을 들어주는 이인혜씨.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를 지켜주는 아내가 바로 윤희상을 일으킨 또 하나의 희망이다.

 

지방 공연이 잦은데다 술과 사람 좋아하는 기질 탓에 원래도 100점짜리가 못 되었던 남편은 아직까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고. 그래도 아내는 허리에 침까지 맞으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남편을 번쩍번쩍 들어 옮기고, 3시간마다 소변을 빼내느라 늘 토끼잠을 자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린 일이 없다고 한다.

 

“참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좋은 여자예요. 아프다는 핑계로 심한 짜증을 부려도 항상 웃으면서 받아주고, 늘 ‘당신은 일어설 수 있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줘요. 제가 무뚝뚝한 편이라,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 말로는 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사고로 오른쪽 눈을 심하게 다쳤을 때, 병원에서는 의안 이식 수술을 권했으나 이인혜씨가 시력을 회복하지 못해도 좋으니 기존의 안구를 보존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연예인으로서, 스타로서,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그녀의 고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세 번의 수술 결과 윤희상의 오른쪽 눈은 1월말 마지막 수술을 마치면 실명에 가까웠던 상태에서 시력 0.4 수준으로 회복된다고 한다.

 

“요즘은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살고 있어요. 예전의 윤희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던 그가 자청해서 ‘코끼리’라고 불리는 운동 기계에 앉겠다고 했다. 이인혜씨는 요즘 남편의 팔 힘이 좋아져서 방향만 잡아주면 몸을 이동할 수 있게 되어 덜 힘들어졌다고 한다.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추어 자리를 옮긴 윤희상은 지체없이 운동을 시작했다. 손목의 힘으로 페달을 돌리면 다리 운동의 효과까지 내는 기구인데, 무척이나 힘이 드는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노래는 나에게 마약과도 같다

 

1979년 ‘칠갑산’(가수 주병선이 부른 이 곡의 원래 주인공은 윤희상)으로 가요계에 입문해 올해로 지천명에 들어선 그는 2006년을 새로운 데뷔 원년으로 삼았다. 20여 년간 무명 가수로 불렸던 시절을 곱씹으며 몸은 비록 휠체어에 의지했지만, 노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 남은 열정을 바치고 싶다고 한다.

 

“주먹이 쥐어지지 않을 만큼 손에 힘이 없는데, 희한하게도 마이크를 잡으면 절대 안 떨어뜨려요. 100%는 아니더라도 70% 이상 확신하고 있어요. 팬들로부터 분명 옛날과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요. 노래는 진짜진짜 자신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서 아내를 생각하며 가사를 썼다는 신곡 ‘파티’의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어둡고 험한 바람 저 바람이 그치면, 내일은 해가 뜬다. 산들바람이 분다, 너와 나의 파티를 준비할 거야. 힘껏 노를 저어 꿈을 찾아가련다. 오늘은 그대 내 사랑을 위하여.”

 

윤희상은 원래 이 곡을 새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채택하려고 했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곡이라 왠지 쑥스러울 것 같아서 다른 곡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1월말이면 새 앨범 수록곡의 편곡 작업이 모두 끝나서 바로 녹음에 돌입할 예정이라니 이른 봄이면 윤희상이 준비한 비장의 신곡 발표회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병상을 지키고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고 보면 세상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요. 그쵸?”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 담배 한 대를 다시 꺼내든 윤희상은 “살다보면 힘이 들어서 희망의 끈을 놔버리고 싶을 때가 있죠?”라고 물었다. 그는 그런 기로에 놓인 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아울러 기회가 된다면 강원래와 함께 한 무대에 서서 의미 있는 공연을 하고 싶다는 소망도 전했다.

 

“여러분, 힘들 때는 윤희상도 저렇게 사는데, 내가 왜 못하겠느냐는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은 즐기는 자에게는 맥을 못추는 법이랍니다”라며 밝은 웃음을 전하는 그에게서 새로운 희망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 / 장회정(자유기고가) 사진 / 박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