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국회, 예산 볼모로 해마다 이념전쟁

강산21 2005. 12. 26. 22:34

국회, 예산 볼모로 해마다 이념전쟁
 
[내일신문 2005-12-26 17:18]
매년 연말만 되면 ‘계절병’ 도지는 정치권

“이념으로 정국 끌고 가면, 그 끝은 파국 뿐”
“이념중심으로 정국을 끌고 가면, 그 끝은 파국뿐이다.”

 

국가보안법 등 ‘4대입법’ 처리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난해 12월 31일, 새해를 맞기 전 2시간을 남겨두고 여야는 예산안과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을 처리했다. 하지만 국보법 등 쟁점법안에 대한 합의가 깨지자 국회는 다시 파행으로 치달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5년 12월, 여당의 사립학교법 강행처리로 촉발된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은 2주일째 계속되고 있고, 국회는 아무 것도 못한 채 연말을 넘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말과 올해 말 정국을 들여다보면 국회파행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해는 국보법 처리에 ‘목숨을 걸었던’ 여당이, 올해는 사학법을 이념논쟁으로 끌고 간 한나라당이 파행을 주도하고 있다. 파행의 주체만 달라졌지 지난해나 올해나 이념대립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정치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국보법 파동을 겪으면서 여당은 이념 중심으로 정국을 끌고 가면, 결국 남는 것은 파국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작년에는 여당이 이념의 덫에 걸렸다면 올해는 한나라당이 여당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산 담보로 ‘벼랑 끝 전술’ 되풀이 = 17대 국회 들어 더욱 극심하게 전개되고 있는 여야간 이념전쟁은 ‘새해 예산안’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예산안을 연내에 처리하지 못하면 국가운영에 엄청난 차질이 생긴다는 것을 여야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산안을 담보로 ‘벼랑 끝 전술’을 쓰는 게 마치 습관처럼 돼 버렸다. 정치권 전체가 연말만 되면 도지는 계절병에 걸린 것이다.

 

원래 새해 예산안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 2일까지 처리해야 한다. 90년대 들어 올해까지 국회가 예산안을 시한 안에 통과시킨 것은 다섯 번에 불과하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새해를 넘기진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자칫 예산안 처리를 새해로 넘겨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다. 지난 25일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했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같은 날 “이렇게 (장외투쟁을) 끝낼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버티고 있다.

 

28일 국회가 정상적으로 속개되면 예산안 처리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다.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으로 국회가 파행되기 전 여야는 예산안 계수조정 작업을 약 열흘간 진행해 왔다. 국보법 논쟁으로 예산안을 새해를 넘기기 2시간 전에 처리했던 지난해 여야의 계수조정 작업 기간은 고작 나흘에 불과했다.

국회 관계자는 “올해만큼 국회가 예산안을 꼼꼼히 따진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원내 지도부 사라져 … 싸움 말릴 사람 없다 = 올해 연말 국회가 지난해와 다른 점은 여야 모두 원내 지도부가 없다는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당 의장이 원내대표를 겸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사학법 처리 후 장외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원내대표의 역할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지난해에는 양당의 의장과 원내대표 4인이 ‘4자회담’이라는 형식으로 마지막까지 쟁점법안에 대한 일괄협상을 벌여 그나마 합의점을 도출해 냈었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해와 같은 최소한의 협상통로마저 막혀 있는 상황이다. 국회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원내대표가 사라진 이상, 당 의장이나 당 대표의 생각을 바꾸거나 고집을 꺾을 만한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이런 현상은 내년 지방선거와 내후년 대통령 선거라는 대형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있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당리당략을 우선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해마다 연말만 되면 이념대결로 날을 새고, 당 대표 1인 중심의 독단적인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한 17대 국회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운영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신창훈 기자 chunsim@naeil.com